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14. 11:23

고통의 문제

(삼상 1:1-18)

 

어두운 사사시대가 가고 있다. 사무엘이 탄생한 시기는 사사시대의 마지막 시기였다. 사사기를 통해 본 이스라엘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룻기를 통해 본 이스라엘은 희망이 싹텄다. 문제는 어둠을 볼 것인가, 희망을 볼 것인가이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어둠을 보고, 어떤 사람은 희망을 본다.

 

희망은 어떻게 오는가? 사사시대를 지나면서 누군가는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 빛의 세계가 나올 거라는 희망을 갖고 끊임 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희망은 기도와 함께 온다. 기도에 어떤 효력이 있다기 보다, 기도를 통해 희망의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희망의 빛을 주시는 분이다.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오늘 이야기는 그 희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준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엘가나이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 가운데 살던 레위 지파 그핫 계열의 후손이었다(대상 6:22). 그에게는 부인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한나고 다른 하나는 브닌나였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했고, 브닌나는 자식 없는 한나를 조롱했다. 다시 말해, 불임의 문제와 그로 인한 삶의 고통이 자리잡고 있다. 희망은 그냥 오지 않는다. 이러한 고통-어둠을 뚫고 온다.

 

사무엘은 그냥 태어난 인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태어난 인물이다. 그가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빛을 가져다 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오늘 한나에게 닥친 시련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고통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것은 곧 삶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살아 숨쉬는 것은 모두 신음한다. 몸부림치지 않으면 살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의 삶이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다음의 세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마음이 슬프냐”(8),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10),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15). 이처럼 한나의 마음이 마치 전쟁터와 같이 되어서 혹독하고 잔인하게 시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나의 삶이 그렇게 고통 가운데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남편 엘가나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5, 6). 엘가나가 한나에게 얼마나 잘 했는지는 다음 구절이 보여준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8).

 

겉으로 보기에 한나는 오히려 기쁨에 겨운 것처럼 보인다. 남편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살만하다. 그런데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한나의 삶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나 고통은 다른 곳에서 온다. 삶의 문제는 깊은 곳,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다. 정작 나를 괴롭히는 고통의 문제는 누군가와 나누기도 쉽지 않다. 나누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의 깊은 고통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고, 보여준다고 한들 그것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의 경우를 보자. 그의 고통은 자식 없음에서 왔다. 그런데 그러한 고통을 누군가와 나눈다고 한들, 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롱거리가 된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나는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0).

 

굉장히 뻔한 말 같지만, 정작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를 마음에 품고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학대하거나, 또는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것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를 잊어보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고통의 문제로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결국 우울증을 거쳐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고통의 문제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사회적 고립 상태로 들어선다.

 

한나는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왔다.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구원)해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서원 기도까지 한다.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

 

성경은 한나의 기도 내용을 이렇게 짧게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한나의 기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12). 사실 기도 시간은 내면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의 기도는 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그 간절함 때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시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이다.

 

실로의 성전에서 드려진 한나의 기도는 그곳을 지키고 있던 엘리 제사장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엘리가 보기에 한나는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한나가 취해서 취기에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해했다. 엘리는 한나를 이렇게 꾸짖는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14). 엘리의 꾸짖음에 한나는 이렇게 항변한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15).

 

여기서 한나가 엘리를 내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말할 때, ‘통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샤파크인데, 이는 쏟다’, 엎지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는 말은 내 심정을 쏟아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해 준다.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께 나아와 쏟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고통의 문제에 짓눌려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이 일에 너무도 서투르다. 내 안에 해결되지 않는 고통의 문제를 안고 살다 보니,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인데도, 거기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인생에 평안이 없다. 내 안에 평안도 없고, 대인관계에서도 평안이 없다.

 

사람의 삶의 문제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에 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남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를 지닌 자는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 쏟아내야 한다. 그래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한나가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 진실되게 쏟아놓은 것을 안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평안을 빌어준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 이에 대해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도달한 것을 확신한 한나는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19). 그리고 한나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다.

 

삶의 희망은 이렇게 고통-어둠을 뚫고 지나갈 때 온다. 왜 인생은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도대체 왜 인생은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고통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 신비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고통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나침반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같은 문제를 놓고 상반되게 반응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고통을 통해 어둠을 보고, 어떤 이는 고통을 통해 희망을 본다.

 

십자가의 어둠에서 부활의 희망을 보는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십자가의 어둠 앞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고통의 어둠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와 고통을 쏟아 놓는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예수 믿고 죽은 후에 천당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를 괴롭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은 미래적이 아니라, 현재적이다. 언제까지 고통을 쏟아놓지 못해 자신을 괴롭히고, 남을 못살게 굴면서 살아갈 것인가? 언제까지 평안 없이 살 것인가? 바로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오라. 그리고 쏟아 놓으라. 그리고 이 음성을 들으라. “평안히 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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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