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29. 22:05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롬 6:12-23)

 

교회 다니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이다. 너무 많이 듣다 보니까 익숙하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 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죄라는 말뿐만이 아니라, ‘라는 말도 많이 듣는다. 그런데 도대체 란 무엇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이라는 말은 거부감까지 든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는 말씀까지 있는 것 같은데, 종이라는 말은 왠지 꼬리 중의 상꼬리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증거하는 복음은 말 그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정체성이 바뀐 그리스도인에 대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죄의 종은 무엇이고, ‘의의 종은 무엇인가?

 

우선 죄에 대해서 알아보자. 죄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설명하시겠는가? 죄라는 것을 떠올리면 실정법적인 죄부터 생각할 것이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을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죄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보다 근본적인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죄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메타포이다. 죄라는 말만큼 자기 자신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말도 없다.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죄는 휴브리스라고 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것, 신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 모든 관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것이다(마커스 보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202).

 

그러니까 죄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부여되는 메타포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과도하게 부풀려서 신 같은 존재로 여기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한 개인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집단이나 국가, 또는 인류 자체에서도 발생한다.

 

교회라는 집단도 스스로를 과도하게 부풀리면 그 자체가 신적인 존재가 되어 거기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적절한 희망을 주고 그에 상응한 과도한 요구를 할 수 있다. 사실 이단들이 이렇게 작동한다. 이단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집단을 과도하게 부풀려서 자신들이 무슨 진리를 담보하고 있는 듯 자기 자신을 꾸미는 것이다. 이단 교주에게서 특히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데,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 거의 신적인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이단 교주의 특징이다.

 

국가라는 집단도 그렇다. 이것은 사무엘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데,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권(국가)의 병폐를 지적하며 왕을 세워달라는 그들을 설득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은 왕이 세워지면 국가가 자신들의 당면한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헛된 바람이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국가는 왕을 내세워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렸고, 그러다가 결국 그 누구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고 만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국가가 하나님을 대신 하지 못했다.

 

죄의 종이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 신과 같이 되려 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 모든 관계의 중심으로 놓으려고 하는 속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태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을까?

 

여기서 용서에 대한 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죄의 종을 용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죄의 종이 용서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흔히 용서를 눈감아줌정도로 생각한다. 만약 용서가 그런 뜻이라면, 죄의 종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서 신과 같은 존재로 남고 싶어하는 존재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부풀릴 테니까. 이런 경우, 오히려 용서가 그들의 존재의 부풀림을 정당하게 해주는 구실만 마련해 줄 뿐이다. 용서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자기 자신을 부풀려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이단 사이비가 작동하는 기재이다. 용서와 구원을 그런 식으로 수여해준다.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릴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죄의 종의 상태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를 그냥 용서해 주고, 그 상태를 그냥 인정(구원)해 주고 만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이단 사이비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용서와 구원은 차원이 다르다. 말 그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존재의 변화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변한다는 것은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 18). 여기서 죄로부터 해방되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부풀려서 신처럼 되고자 하는 그 욕망, 상태에서 벗어난 상황을 말한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 바로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함으로 가능하다. 그러면 교훈의 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을 마음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을 표현한 말이다. 다시 말해 믿음이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이다. 그들은 법 아래 있기를 좋아한다. 그 단적인 예를 바리새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게 법은 자기 자신을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남들이 지킬 수 없는 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풀렸다. 법을 지키지 못하는 남들과 같지 아니함을 자랑스러워 하며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시기를 바랬다.

 

사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기 위해서는 남들과 자신들을 경계 짓는 법이 더 필요하다. 대표적인 예가 대학입시이다. 대학입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을 만드는 이다. 좋은 점수를 받아 소위 명문대학에 가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 신처럼 부풀려진 명문대학생들은 그때부터 남들 위에 군림하게 되고 자신이 남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그러한 입시제도를 철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남들과 구별하고 차별하는 그 어떠한 을 완전히 허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허무신 분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공부 못하는 이들도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현실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공부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할지.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처사를 얼마나 불공평하다고 느낄지.

 

그러나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의 관심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놓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말한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구분하는 그 어떠한 (잣대)’을 모두 허무는 일을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와 너의 관계를 정립시켜주는 (잣대)’로 작동하게 끔 하는 것이다.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기러기 떼가 북반구로 날아가는 동안

지구에도 밤은 찾아오고

공원의 벤치에서 홈리스들은 아침을 맞네

 

집이 없는 사람에게

벤치는 집일까 침대일까

잠자면서도 출렁이는 보트피플들은 구유에 담긴

예수처럼 어리고 슬프다

 

기러기를 길들이면 정말로 거위가 될까?

거위는 새로 얻는 집을 사랑할까

 

지구의 북반구에서 완결되지 못한 이야기를

남반구에서 시작하려 한 건 누군가의 잘못

흩날리는 페이지들이 꿈속에서 가벼운

집을 짓는다 나더러 부수라고

 

코와 입과 눈이 섞인 얼굴들이

꿈속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동안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하재연 시집,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중에서>

 

바울 사도는 말한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21). 여기서 그 때란, 죄의 종이 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려 자기 자신이 신이 된 양 하면서 살았을 때 결국 거기서 맺어지는 열매는 죄의 열매 밖에 없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실정법에 저촉되는 끔찍한 범죄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부풀려 살다가 좌절하게 되면서 저지르게 되는 죄의 열매들이다. 결국 자기 자신을 부풀려서 사는 사람에게 닥치는 것은 사망(죽음)’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이 있으니,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복음이다.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2). 자기 자신을 부풀리는 일을 그만두고, 다시 말해, 다른 사람(존재)과 나 자신을 구분하려는 을 무너뜨리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되는데, 결국 그 열매의 끝은 영생이다.

 

의가 곧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된다. 영생이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고 사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 곧 구원의 삶, 영생의 삶이 되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면서 살아봤자,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그렇게 살아가라고 부추긴다. 세상의 모든 시스템이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사실 우리는 의식 못하는 가운데 거기에 놀아나는 것뿐이다. 정신을 좀 차려서 세상을 바라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중요하다. 나 자신을 부풀리면서 살아봤자 결국 내가 두 손으로 얻어낼 수 있는 열매는 죽음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거룩한 삶을 만들어 가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을 약속하신다. 그것을 그냥 선물로 주신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이 세상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면, 이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못 견디는 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의의 종으로 존재의 변화를 이룰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자유함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사(공짜로 주시는 선물)로 주시는 영생(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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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