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26. 13:08

장자권 쟁탈전

세기 27

(창세기 25:27-34)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자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속성상 하시는 모든 일이 사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은 별다른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에 주저 없이 아멘으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맞닥뜨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이 혼란스러운 신앙을 불러 일으킨다. 특별히 삶을 깡그리 파괴할만한 위력을 지닌 사건이 삶 속에 발생했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한 없이 무력해 보이는 인간에게 그나마 주어진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기도일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해 안 된다고 고래를 절래절래 흔들다가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면 어느 순간 이해가 된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물론 그 기도 또한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특별히 기도복음서라 불리는 누가복음은 겟네마네 동산에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22:44).

 

하나님의 주권은 신비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길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는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기도는 쉽지 않다. 한 번의 기도로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기도는 한 순간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걸어가야 할 순례이다. 이처럼 기도는 인간에게 숙명이다. 기도는 자신의 얄팍한 욕망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에 도달하는 순례이다. 기도가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깨달아도, 이미 기도의 순례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위해서 기도했고, 리브가는 태중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불임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이삭은 기도했고, 하나님은 불임의 신비에 응답해 주셨다. 그래서 리브가는 그 신비를 열어젖히고 잉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리브가의 뱃속에서는 신비로운 일이 또 일어났다. 두 아이가 발을 걷어차며 서로 싸우는 듯한 상황이 매일 연출됐다. 그래서 엄마 리브가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이런 응답을 받았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쟁탈전이 복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엄마 리브가는 하나님의 신비에 마음을 두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하나님의 신비였다. 보통 어린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이 이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는 그 반대였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삭은 에서를 더 사랑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에 접한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편애 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집중했다는 뜻이다.

 

복중에서의 장자권 쟁탈전은 에서의 승리였다. 에서가 먼저 나왔다. 그러나 쟁탈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쟁탈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세상에 나왔다. 장자권 쟁탈전의 최후 승리자는 누가 될 것인가?

 

에서가 먼저 세상에 나옴으로, 사실 에서는 장자권 쟁탈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서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만다. 장자권을 하찮게 여긴 것이다. 일의 사정은 이렇다. 에서는 사냥꾼이었다.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사냥을 하고 돌아온 에서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마침 쌍둥이 동생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다.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던 에서는 야곱에게 그 죽을 달라고 한다.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야곱은 에서에게 장자권을 팔라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서는 야곱의 제안을 넙죽 받아 든다. 그 이유가 이렇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배고파)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업도록 살피라”(12:16). 히브리서는 음행하는 자와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동급으로 말한다. 음행하는 자란 누구인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음행하는 자는 우상숭배자를 일컫는 말이다. 또는 자기 부인이나 남편을 버리고 다른 여자나 남자에게 관심을 두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우상숭배를 가리킬 때 음행하는 자라는 메타포를 쓰는 이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자나 음행으로 결혼을 파기하는 자나 똑같다. 우상숭배자는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고, 음행으로 결혼을 파기하는 자는 자기의 부인이나 남편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다. 결국 에서를 음행하는 자와 동급으로 설명하고 있는 히브리서는 에서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죄를 범했다고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자는 망령된 자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헛것 취급하는 것만큼 큰 우상숭배가 어디 있는가? 그야말로 에서는 헛된 짓을 하는 망령된 자인 것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그렇다면 장자의 명분이 왜 중요한가? 첫째로, 장자는 두 배의 분깃()을 받는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 받을 때, 만약 아들이 세 있다면 아버지의 재산을 네 등분 해서 두 아들에게 한 분깃씩 나누어 주고, 두 분깃은 장자가 갖는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분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 분깃을 물려 받을 만큼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역사가 장자에게 임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장자는 축복권을 가지고 있다. 뭔가를 나누어 주려면 그만큼 더 많은 풍요로운 속에 있어야 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축복은 장자에게서 나와 그 아래로 흐른다. 장자가 축복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축복을 귀하게 여겨 그대로 복을 내려 주신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장자만이 가지는 권리이다.

 

셋째로, 장자는 예배를 수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예배를 수행한다는 것은 레위 제사장들이 성전의 일을 맡아 보면서 누렸던 은총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대제사장은 공동체를 대표하여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였다. 예배를 수행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뜻이다.

 

장자의 명분이 지니고 있는 이 세 가지의 권리를 종합해 보면, 결국 장자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함으로 삶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식을 얻는 것,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만큼 인생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인간에게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공허함(emptiness)이다. 인생은 공허하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정말 처절하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별의 별 짓을 다한다. 그러나 채우지 못한다. 솔로몬의 고백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봤지만, 그는 그 어느 것으로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 12:1-2).

 

안식은 오직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텅 빈 마음에 당신의 생기(루아흐)를 불어 넣어주실 때만 비로소 우리는 안식에 거할 수 있다.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아무리 건강하게 살아도,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으로 살아도,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삶 가운데 안식이 없을 때이다. 안식이 없는 삶은 살아 있으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장자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 가까이 함으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그리스도의 장자권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서의 장자권을 누린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장자권을 포기할 수 없다. 장자권 쟁탈전에서 승리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로 에서처럼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돈 몇 푼 때문에, 피곤하다고, 귀찮다고,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장자권을 빼앗아 가려는 마귀의 술수가 매일 같이 삶 속에서 일어난다. 베드로 전서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피 흘리기까지싸워야 한다. 장자권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장자권 쟁탈전에서 승리한 자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에서처럼 망련된 자가 되어 장자권을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에서의 후손이 아니라, 야곱의 후손이다. 장자권 쟁탈전의 승리를 거머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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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