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8. 22:56

존재의 변화

(사도행전 2:14-21)

 

승천주일에 살펴본 예수의 승천 이야기는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우주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갔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존재가 바뀌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였습니다. 로마 당국에 의해 처형 당한 예수는 승천(높이 올려짐)을 통하여 주님으로 선포됩니다. 예수 당시 주님은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주님인 로마의 황제가 예수를 처형시켰으므로 황제가 예수보다 힘 세고 높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부활과 승천으로 인하여서 그 결과가 뒤집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과 승천은 누가 이 세상의 주님이냐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 세상의 주님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라는 것이죠.

 

예수가 이 세상의 주님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앎의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실천의 차원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냥 말로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외칠 수 있지만, 정말로 인생을 살면서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뜻은 그 분께 집중하면서 그분의 말씀과 삶을 좇아 소위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인데, 그것이 좀처럼 우리 삶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승천에 이어 벌어지는 사건인 성령강림은 바로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자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인식된 예수는 곧 우리의 존재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성령이 부어지는 성령강림 사건은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인정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인해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강림은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 당연한 사건이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변화되는 매우 실존적인 사건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알려면, 우선 성령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어떤 마성적인 힘이나 우리가 흔히 귀신이라 부르는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성령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예수와 연관됩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일컬어 하나님의, 예수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3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고후 3:17-18).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반지의 제왕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령강림은 곧 왕의 귀환인 것이죠. 성경강림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각 사람 마음에 부어지는 사건입니다. 그야말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의 실현이 바로 성령강림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던 예수의 제자들은 성령강림을 통하여 예수와의 일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신비롭고 결정적인 경험인데, 이것을 통하여 그들은 온전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즉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의 혀로서 내려온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의 언어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의 변화는 엄청난 일을 몰고 옵니다. 이것이 단순히 고운 말 공손한 말을 쓰게 되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불의 혀로서 내려온 성령이 임한 제자들이 말할 때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제자들의 말 속에서 그들의 언어를 듣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쓰는 두 사람이 서로 각자의 말을 하는데도 그들이 서로 알아듣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바벨이라는 말의 뜻은 혼란입니다. 영어의 ‘babble’이 거기서 왔는데, 이는 횡설수설을 가리킵니다. 바벨탑 사건 이전에 온 인류는 한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인류의 언어는 뒤섞여 버려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각자의 언어와 민족으로 갈라졌고, 거기에는 오해와 대립 그리고 갈등만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바벨탑의 사건과 정반대의 상황을 그리는 것이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인류는 다시 통합되기 시작한 것이죠. 오해와 대립, 갈등 대신에 이해와 화해, 그리고 협력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강림을 통해 시작된 이해와 화해 그리고 협력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가2 44절 이하에 나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람은 기본적으로 손을 움켜쥐고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인가를 움켜지는 것에 집착을 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 참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움켜진 손을 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자랑하고, 보이는 것을 손에 움켜쥐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움켜쥐려 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보여줄 수는 없으나, 그 어느 부자보다 더 풍요롭습니다. 우리가 움켜쥐려고 하는 것들은 모두 어느 시점이 되면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한 번 움켜잡으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이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한 번 손을 움켜쥐어 보십시오. 주먹이 됩니다. 움켜쥐려는 사람은 인생을 주먹질 하다 끝냅니다. 움켜쥐려다 보니, 남을 해치지 않고는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움켜쥐려는 것을 다 내려놓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이렇게 기도하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움켜쥐려는 것을 내려놓고, 이렇게 기도하는 손을 가진 사람은, 주먹을 쥐고 남을 해치려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남의 삶을 복되게 하는 기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성령강림을 통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요엘서의 말씀이 실현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대중들 앞에 서서 요엘서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합니다. 요엘서의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성령강림)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여기서 예언, 환상, 등의 그림언어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관련된 말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로 주님으로 일컬어지는 로마 황제가 하는 일은 당장 눈에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협적입니다. 특별히 소위 평화를 위해서 가해지는 폭력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 넣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이나 늙은이들이나 남종이나 여종들이 보는 환상이나 꿈그리고 그들이 하는 예언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들은 로마 황제의 극악무도한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리고 그 우편에서 주님으로 고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게 되는 가장 큰 것은 이 세상의 구원자, 주인, 주님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성령강림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성령강림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읽습니다만, 그것을 보면서 그저 신기한 일 구경한 것처럼 하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성령강림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사건입니다.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게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건을 겪어야 존재가 변화됩니다. 성령강림이 사건으로 다가와야 우리의 존재가 변화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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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