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15. 23:19

성령의 교제

(고린도후서 13:11-13)

 

설교 제목이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성령교제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생명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생명의 영,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어떤 다른 존재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다.

 

본문의 마지막, 13절은 이렇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문구는 예배 말미에 축도로서 사용된다. 한글로는 교통하심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부분이, 바로 교제(코이노니아)’이다. 원문에 충실해서 번역하면, “성령의 교제가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교통이나 교제나 코이노니아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다. ‘교통은 서로 상호 간에 일어나는 그 무엇을 전제한다. 코이노니아라는 것은 상호 간에 일어나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헬라어이다. 이것을 라틴어로 옮기면 콤뮤니오(communio)’라고 하는데, 여기서 영어의 ‘communion’이 나왔다. ‘COMMUNION’이 무엇인가? 성찬식을 일컬어서 ‘Holy Communion’이라고 한다. 이것을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거룩한 교제가 된다. 성찬식은 거룩한 교제이다. 왜 거룩한 교제인가?

 

성찬식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그것을 통해서 어떠한 마법적인 힘을 수여 받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어떤 사육제의 의식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살을 못 뜯어 먹어서 안달 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식인종이 아니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에 살과 피를 입은 실체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내 눈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실체, 교제, 일치라는 말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 또는 오류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담보 받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수여의 개념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는 말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수여 받는다라는 개념이 아니다. 만약 구원을 수여의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면, 예수와의 교제는 필요 없어진다. 이는 마치 어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적선하는 것과 같아진다. 부자와 가난한 자와의 교제가 없어도,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적선을 통하여 무엇인가 받을 수 있다.

 

구원은 수여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다. 오늘의 핵심 단어로 다시 표현하면, 구원은 교제의 개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수여받는 데서만 그친다. 그렇다 보니, 구원이 무슨 물건 사듯 믿음이라는 재화()’을 통해서 살 수 있는 것처럼 전락하고 말았다.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물건 사듯이,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 속에는 구원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구원과 거룩한 교제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교제 없이 구원을 얻을 길은 없다.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교제 없이 구원만 받기를 바라는 것은 일 하지 않고 임금만 받기 원하는 게으른 종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너무 구원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구원은 우리의 일차 목표가 될 수 없다. 구원이 일차 목표가 되는 한, 모든 것은 상대화 되고 만다. 구원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은 수단이 되고 만다. 구원이 목표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조차도 구원을 이루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러한 오류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구원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구원은 목표가 아니라 선물이다. 우리의 일차 목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는 남녀가 깊은 사랑 가운데 빠지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자녀와 같은 것이다. 자녀를 목표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녀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교제는 성령에 참예한다는 뜻이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이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은혜는 값 없다라는 뜻이다. 값 없는 은혜는 오직 사랑에서만 올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은 은혜다. , 값 없다. ‘값이 없다는 것은 싸구려라는 뜻이 아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는 뜻이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결단코 인간은 값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nature)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향(orientation)이다.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고 성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의 역사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무슨 역사를 이루는가? 고린도 후서의 핵심 말씀은 517절에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는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를 이루신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교인들끼리 분열이 심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성령의 교제를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분열이 심한 교인들끼리 서로 잘 지내라는 권고의 측면이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11).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핵심 단어는 이것이다: 기쁨, 온전, 위로, 한마음, 평안.

 

이러한 것들은 그저 이들이 서로 잘 지낸다고 해서 오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표지들(signs)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불러오는 새로운 피조물은 기뻐하고, 온전하며, 위로 받으며, 한마음이 되며(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 평안(안식)하게 된다.

 

교제란 바로 이런 것이다. 교제란 만나서 희희락락거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제, 성령의 교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는 신비이다. 구원이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목표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선물이다.

 

성령의 교제는 성령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령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성도들 가운데 오신다. 성령의 교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에게 문안한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자들은 기뻐하고, 온전하며, 위로 받으며, 한마음이 되며, 평안 가운데 거한다. 그러니 어찌 거룩한 입맞춤으로 성도와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우리를 단순히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서로 잘 지내는 것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 구원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빛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그 새로운 창조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된다. 성령의 교제가 바로 그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얼마나 은혜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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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