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8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2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진술이 가장 중요하다. 이 진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뜻과, 하나님의 뜻에 종속된다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모두 선하다(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어떠한 이유에서 건 미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죄의 개념이 생긴다. 죄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의 언어로 다시 옮기자면, 죄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해 보자.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지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는 선악의 판단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악이다.

 

(어제 최순실이 특검에 출두하면서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자백을 강요하고 있어요!” 이 뉴스를 접하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페이스북에 한 마디 남겼다. “그러면 자신이 한 짓은 민주주의인가?”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신에게 불리하면 악이 된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했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선은 '내 욕망의 성취'일 뿐이며 욕망이 성취되지 않고 좌절되면 그것이 악이다. 죄는 선과 악의 기준이 사사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악이 판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과 악이 사사로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선을 선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으로 규정한다. 이제 인간은 악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이게 바로 죄이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나온다. 몹시 배고픈 여유가 길을 가다가 포도나무를 발견했다. 여우는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를 따먹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서 결국 그것을 못 따먹었다. 여유는 포도 따 먹는 것을 단념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 포도는 분명 신포도일거야!”)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나는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따먹고 싶은 맛 있는 포도였다가, 자신에게 불리하고 따먹지 못하게 되니까 신포도가 되는 것이다. 포도는 그대로인데,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위치냐에 따라서 그 포도의 선과 악이 갈린다.

 

결국 동산 중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된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져처음 본 것은 자기들이 벗은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보였다는 뜻이다. , 자기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나스키소스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그 이야기에서 나르시스즘이 생겨났다.

 

(나르키소스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모습에 매료되어 결국 우물에 빠져 죽는다. (이 외에도 여러 판본이 있다. 그것이 우물에 비친 모습인 것을 알고, 굶어 죽었다는 판본, 또는 자살했다는 판본) 나르키소스의 뜻은 또는 무감각이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잠을 자는 것처럼 죽은 모습이고, 자기 이외에 타자 또는 사물에 대하여 무감각해진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해져 자기 자신 밖에 안 보인다.)

 

죄에 빠지면, 즉 선악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애에 충만해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불화와 두려움과 죄의식과 핑계가 그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거니셨다. 그들이 죄 짓기 전에는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숨는 행위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가 그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그들은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즉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핑계를 댄다.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죄를 전가 시킨다. 이들이 왜 이렇게 핑계를 댈까? 자기애 때문이다. 자기 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것도 선과 악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선과 악의 판단이 사사로워진 것이다. 자기는 선하고, 남은 악해 보이는 것이다. 아니, 자신은 선하게 판단하고, 남은 악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자기는 잘못 없고, 남이 잘못한 것이다.

 

이게 참 비극이다. 왜 그런가? 아담과 하와가 어떠한 관계인가? 2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시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다. 하나님은 잠이 든 아담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돕는 배필을 보고 아담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결혼식 때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죄가 들어가니까 아담에게서 하와가 분리된다. 이들은 더 이상 한 몸이 아니게 된다. 아담은 자기 살겠다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아내를 팔아 먹는다. 이런 현상이 하와에게서도 발견된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자신은 선한 것으로 판단하고, 뱀은 악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보았듯이,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31절에서도 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죄란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부정하게 한다. 죄는 선한 것을 악하게 만든다.

 

죄는 결국 불화를 조장한다. 죄가 없을 때는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모든 것이 불화가 조성된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하와와 뱀, 즉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구원이란, 화해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 말씀에서부터 시작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 화해란 다른 말로 해서, 자기애 때문에 자기 자신만 보던 눈을 나 아닌 다른 피조물(타자)에게로 돌리는 것, 피조물을 넘어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구원이란, 화해란, 주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물으실 때 숨어서 자기 자신만 보는 게 아니라,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서 그들을 돌보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뵙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회 공과 3과에서 묻는) “네가 어디 있느냐?”의 질문은 위치 정보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 정보를 묻는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구글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필요한 것이다.) 불화 가운데 있냐, 화해 가운데 있느냐.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 있느냐, 나 몰라라 하고 있느냐.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뵙고 있느냐, 숨고 있느냐.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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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