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30. 19:17

라마 나욧 같은 교회

(사도행전 6:1~7, 사무엘상 19:18~24)

 

역동적인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66권의 성경 중 사도행전만큼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성경도 드물다.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 메너리즘에 빠지고 원치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잘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때마다, 우리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면밀히 살펴 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초대교회도 처음에는 매우 순탄하게 성장하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120 여명의 열 두 사도와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에 힘 입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복음을 힘차게 전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했다. 가는 곳 마다 거침 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했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도 고쳐주는 기적을 베풀었다. “금과 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은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내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능력인 줄로 믿는다! 삶에 어려움이 있거든, 능력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라!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일어날 줄로 믿는다!

 

초대교회의 절정은 432절 이하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2-35).

 

무서운 광경이다. 요즘, 이단들이나 하는 일이,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일어났다. 신천지에 빠져서 재산을 탕진하고, 남편과 자식들까지 모두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요즘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종말론적 신앙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분별이 필요한 말씀이다.

 

아무튼, 이렇게 무섭게잘 성장하던 초대교회에 어려움이 닥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어떻게 교회를 어렵게 했는지,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 한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이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

 

6장에 가면, 초대교회는 또다른 어려움을 만난다. 우리가 읽은 말씀이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교인이 많아졌다는 뜻은, 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하던 일 중에 구제 사역이 있었다. 과부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옛날 과부는 먹고 살기 정말 힘들었다. 성경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 삼인 방(나그네, 고아, 과부) 중 하나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이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 중심의 교회였다. 그렇다 보니, 구제하는 일에 히브리파 과부들이 헬라파 과부들보다 더 잘 챙김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헬라파 과부들의 마음이 상했다. 누구든지, 어떤 이유에서든 차별 받으면 마음이 상하는 법이다.

(일례로, 배식을 하는데, 히브리파 과부 식판에는 찡긋이 윙크하며 고등어 몸통 부분을 놓아주며 맛있게 드세요!’하면서, 헬라파 과부 식판에는 고등어 대가리나 꼬리 부분을 놓아주며 본 척 만 척 하면, 마음이 안 상하겠는가!)

 

무엇이든지, 몰입을 방해하는 3가지의 요인이 있다. 안정성의 위기, 의미의 위기, 활력의 위기가 그것이다. 이것을 신앙에 대입해 보면,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도 다르지 않다.

 

안정성의 위기란 이런 것이다. 직장에서 언제 잘릴 지 모르면, 그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게 쉽지 않다. 예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한국을 강타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명 대사가 나온다. “회사는 전쟁터이지만, 밖은 지옥이다.” 미생은 지옥으로 떠밀리지 않으려고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계약직 직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몰입이 떨어진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이니까, 신앙에 몰입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꾸어 가야할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든든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이다.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고,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면 안 된다.

(<시골교회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읽다 보니까, 시골의 한 교회 목사님이 동네 부녀회 회원들이 교회 일을 잘 도와주어서 교회가 잘 세워져 나가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동네 부녀회 회원들이 교회를 도와주는 이유가 자기들이 안 도와주면 교회가 망할까 봐 불쌍해서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그래서 세상을 걱정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도움을 주는 든든한 교회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사람도 보면, 어떤 사람은 걱정시키는 사람이 있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걱정시키는 사람은 안정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걱정해주는 사람은 안정성을 확보한 사람이다. 이렇듯,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겠는가? ‘걱정시키는 교회’? 아니면, ‘걱정해주는 교회’? 우리는 할 수 있다. Yes, we can!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의미의 위기이다. 의미의 위기는 지금 현재 이 일을 왜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위기도 여기서 온 것이다. 그들이 왜 구제사역을 시작했는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의미를 잃어버리니까,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을 차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춘기 때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의미이다. ‘나는 누구니? 나는 왜 살지?’ 사춘기 때는 엄청 고독하다. 그러면서 성장한다. 사춘기를 보내면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인생이 참 힘들어진다. 부모나 선생님은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다른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잘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의미의 위기가 와서 신앙의 몰입이 안된다. “내가 지금 왜 교회에 나오고 있지? 내가 지금 교회에서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이것에 대한 확실한 의미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지 않으면, 신앙의 몰입은 굉장히 힘들다.

 

오바마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독서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에게 의미는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고대교회 교부였던 제롬은 이런 말을 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여 신앙의 의미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오늘 말씀 7절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의미를 충만히 찾아가는 교회를 세워가자.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세 번째 위기는 활력의 위기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가 구제사역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정확히 나온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2). 제자들이 말씀도 전하고 구제도 하고, , 이것저것 하느라 너무 분주하다 보니,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저것도 제대로 못해서 결국 활력을 잃은 것이다.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것이다. “과도한 업무에 몸과 마음이 지쳤다.”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도 마찬가지다. 교회 사역을 과도하게 하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지친다.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행한 일이 바로 일곱 명의 집사를 세운 일이다. 교회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누구 하나의 헌신으로 세워가는 곳이 아니다. 공동체는 더불어 함께 하는 곳이다. 요즘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헌신이 몇몇 사람들에게만 집중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큰 교회에 몰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큰 교회 가면 헌신 안 해도 되니까. 앉아 있으면 다 해주니까.

 

갈라디아서 6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의 법은 혼자서 성취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질 때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서로 짐을 질 때 교회는 활력이 생긴다.

 

우리가 이제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세워 나가야 할 교회는 안정성 있는 든든한 교회, 세상을 걱정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로해 주는 교회, 그리고, 지금 왜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아는 교회, 또한, 서로 짐을 지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 나가는 활력 있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한 마디로, ‘라마 나욧 같은 교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나와 여러분이 함께 꿈꾸고 세워 나가야 하라 교회의 비전이다. 사무엘상하의 말씀은 다윗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중에서 19장은 다윗을 시기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라마 나욧이라는 곳으로 도망친다. 그는 그곳에서 선지자 사무엘과 함께 은신하여 생활한다. 그때도 정보 기관이 있었다. 사울은 정보통을 통하여 다윗이 라마 나욧에 은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령(특공대, 델타포스, 네이비실)을 보낸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울의 전령들이 라마 나욧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그들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혀 갑자기 예언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전령들은 다윗 죽이기라는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그들의 삶이 변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세 번 연거푸 벌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울 왕이 직접 간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도 라마 나욧에 도착하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런 속담도 생겨났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회만 오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교회! 성경의 말씀이 성취되는 교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우리 모두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나가며 연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라마 나욧같은 교회를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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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