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5. 09:34

복 있는 사람

(시편 1:1-6)

 

나는 쇼팽을 좋아한다. 쇼팽의 녹턴이나 왈츠를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까지 든다.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꺼야!’ 언제 이러한 메시지를 집사람한테 보냈더니, ‘유구무언이라는 답장이 왔다. (아마도, ‘그래서 뭘 어쩌라구?’이런 의미였던 것 같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쇼팽의 음악은 음악계의 시편과 같다.

 

성경이 마르지 않은 샘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단연 성경에 시편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은 히브리어로 테힐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찬양의 노래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는 ‘Psalms’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현악기인 프살테리온(psalterion)에서 왔으며, ‘현 반주를 곁들인 노래라는 뜻이다.

 

노래(찬양)는 기본적으로 예술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적 장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와 같이 시편은 노래(찬양)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적(문학적) 장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편 1편의 예를 들자면, 시편 1편의 첫 단어는 아쉬레이고 마지막 단어는 토베드이다. ‘아쉬레복 있는 자이고, ‘토베드망하리로다이다. 그런데, ‘아쉬레는 히브리어의 첫 알파벳인 알레프로 시작하고, ‘토베드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인 타우로 시작한다. 이는 멸망하게 될 악인을 알레프에서 타우까지 먼 것처럼멀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이 대조를 이루어 전개된다.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을 구성하는 시편으로서, 원래 한 쌍을 같이 봐야 한다. 시편 1편이 아쉬레로 시작하는데, 시편 2편은 아쉬레로 끝난다. 이러한 것을 수미쌍관(인클루지오)기법이라고 한다.

 

아쉬레복되다!’라는 뜻이다. 일단 아쉬레를 들으면, 그 다음이 궁금해진다. ‘무엇이 복되다는 것인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자,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자,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는 복되다!

 

구약성경에는 이라는 단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바라크( בּלק)’이고, 다른 하나는 '아쉐르'(אשר)이다. 나의 이해에 따르면, ‘바라크는 일종의 선행은총이고, ‘아쉐르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축복이다. 그러니까, ‘바라크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이고, ‘아쉐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무엇인가를 응답적으로 반응했을 때 얻게 되는 복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라사), 죄인들(하타임), 오만한 자들(레침)과 함께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유죄로 정죄 받은 자들을 말하고, 죄인들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가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자들을 말하고,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들을 말한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로 갈수록 그 상태가 더욱더 악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 있는 사람(의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독야청청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주위에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이 세상에는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의인 곁을 우는 사자와 같이맴돌며 의인을 넘어뜨리려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다음 구절이 그 대답을 주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서 보고자 한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이다. 하가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읊조리다, 으르렁대다, 그리고 꾸민다(plot, device)’이다.

 

우선, ‘읊조리다는 비둘기가 구구대면서 반복적으로 내는 소리를 연상하면 된다. 시편은 눈으로 읽으면 안 된다. (사실, 성경 말씀 전체가 그렇다.) 시편(성경)은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내서 읽어야 한다. 원래 성경은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내어 읽어서 마음에 새겨 외울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잘하지 못한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말씀 중에 시편을 인용한 것이 많은 이유는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시편(구약성경)을 암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시간에 다같이 성경을 소리내서 봉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예배의 과정이다.)

 

둘째, ‘으르렁거리다는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좋아서 그렇다. 이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와 같다. 우리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움켜잡고 으르렁거리며 즐거워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두 번째 이유는 주변에 경고하기 위함이다.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자에게 다가서는 동물은 없다.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사라처럼 으르렁거리며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과 싸워야 한다.

 

사실, 이것도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사자가 으르렁거리지 않으면 주변의 하이에나가 와서 먹이를 덥석 채 간다. 우리 주변을 맴도는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을 향해 으르렁거리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와서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곁을 지나다 그 곁에 서게 되고 그들과 함께 앉게 된다. 이는 첫 말씀 복 있는 사람은 악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의 반대로 가는 것이다.

 

세번째, ‘꾸민다(Plot, Devise)’라는 말은 시편 21절에 표현된 것과 같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Plot, Devise)?” 내가 보기에는 ‘devise’라는 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Devise’‘plan or invent by careful though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심사숙고해서 어떤 것을 계획하고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 가진 깊은 의미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묵상이란 단순히 읊조리며 외우고, 기뻐하며 또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삶을 빚어가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읽을 때 두 가지 자세가 있다. 하나는 informational reading이고, 다른 하나는 formational reading이다.  Informational reading은 성경을 읽으며 그저 거기서 어떠한 정보를 얻으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고, formational reading은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을 새롭게 빚어가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내 삶의 당면한 문제,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새롭게 하는 강력한 능력(power)이다. 시인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항상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말한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여기에는 미완료형 동사가 쓰였다. 영어로는 “He will be like a tree firmly planted by streams of water”라고 되어 있다. 시인은 미완료형 동사를 써서 복 있는 사람의 생명력과 풍성함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순간, 삶이 죽어 있는 것 같고 메마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신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게 복 있는 사람의 자리를 떠나, 즉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악인들의 자리, 죄인들의 자리,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인으로 추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빗나간 화살처럼 내 마음대로 길을 가고, 추악한 말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어느덧 나의 인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한 없이 가벼워진다. 고통이 밀려오고, 허무가 밀려오고, 불안이 밀려오고,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꼭 받아야 한다. 그래서 생명력과 풍성함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가)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읊조리고, 사자처럼 으르렁대고,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빚어가야 한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무엇이 여러분을 생명력과 풍성함 가운데 거하게 한다고 믿는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긴다면, 왜 우리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가? 어떠한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기도드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또는 강퍅하게 살고 있으면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자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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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