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17. 12:45

불신과 믿음의 변증법

(마가복음 5:35-6:6)

 

오늘 말씀은 믿음과 불신이 충돌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본다. 믿음은 한계(불신, 죽음, 친숙함)를 뛰어 넘어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는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 그 사이에 낀 혈루병 여인, 그리고 다시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회장당 야이로는 예수님이 혈루병 여인을 고치는 장면을 보고, 희망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얼른 가시면 우리 딸이 죽지 않을거야.’ 그러나, 가는 도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저 절망에만 휩싸였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곁에선 예수님은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 “두려워하지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à 절망적인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이 위로가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하여, 기억해 두면 좋은 말씀이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 상황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였다.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떠드는 것으로 번역된 말은 원래 훤화함으로 번역되었던 단어이다. 그리고 영어로는 ‘commotion’이라고 번역한다. 이는 마음에 근심이 있거나 두려울 때, 정신적인 동요나 흥분이나 소란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다.

 

성경은 이러한 상황, 사람의 마음을 예수님이 봤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한계 상황에 부닥쳤다. 그들은 더 이상 그 뒤나, 그 이후를 못 본다. 절망은 그때 다가온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이 절망이다. 그들은 야이로의 딸에게 임한 죽음을 보고, 절망했다. 그 뒤나, 그 이후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기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적 혼란을 느끼며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봤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 여기서 떠들며 우느냐는 왜 시끄럽게 우느냐는 뜻이 아니다. 이는 왜 너희들이 한계 상황에 부닥쳐 그 뒤를 보지도 못하고,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왜 그렇게 절망하며 안절부절 못하느냐는 말씀이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정말 멋진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르게 보셨다.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멋진 일이다. 좀 일이 안 되면, 좀 일이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절망하고 실망하고 시험에 들지만, 우리가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을 비웃는다. 그들의 비웃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은 그들의 불신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비웃음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한계를 경험했을 뿐이다. 그들이 경험한 한계는 죽음이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것 때문에 불신에 쌓인다. 그들의 불신은 그렇게 얼토당토한 것만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이것은 먹을 게 없으면 굶어야 했던 노인 세대와 먹을 게 없으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는 젊은 세대와의 간격보다 더 큰 간격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렸을 때는 먹을 게 없어서 굶었어. 손자: 먹을 게 없으면 라면이라도 드시지 왜 굶으셨어요?

 

이러한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한계를 경험한 자들에게 박힌 불신과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행하실 거라는 믿음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40절 말씀을 보자.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은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고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사…” 그렇다. 아이의 부모와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들이 바로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이었다. 아이의 부모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간절함이 있게 마련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간절함이 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벌이실 거라는 간절함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을 간절히 믿었다. (우리도 우리 교회에 대하여, 부모와 제자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드디어, 불신과 믿음의 간격이 메워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예수님의 이 한마디이다. “달리다굼” – ‘소녀야 일어나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소녀를 살리신 일은 단순히 죽은 소녀를 살게 해서 그의 부모를 기쁘게 하고,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복음이다. 12살 먹은 여자 아이가 죽었다 다시 살아났지만, 그는 머지 않아 다시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궁극적인 복음이 될 수는 없다. 12년 사나, 120년 사나,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다른 게 뭐가 있는가? 우리에게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신과 믿음 사이를 메워주는 궁극적인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다음 전개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고향에서의 활동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고향으로 간다. 우리는 거기가 나사렛이란 동네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사람들은 놀란다. 그런데, 그들의 놀람은 믿음의 놀람이 아니라 불신의 놀람이었다.

 

예수에 대한 의문의 서술들이 펼쳐진 후, 마지막에 예수님에 대한 불신의 단어가 등장한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배척하다는 믿음과 반대되는 반응이다.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예수님의 직업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고향 사람들은 그와 어려서부터 함께 컸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6:4).이는 다른 곳에서 존경 받는 선지자라 할지라도 고향에서는 존경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친숙함이 모욕을 가져온다.”는 말이 있다. 친숙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진가를 몰라볼 때가 많다. 특히 가족들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가장 인정을 못 받는 부류가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은 참으로 특이한 집단이다.

 

또한 가족 외에, 나와 더 친숙한 부류가 있다. 누구인가?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도 친숙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어떠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모른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지 말라. ‘못해요, 안돼요하던 사람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을 때 어떤 일을 감당하게 될지, 아무도, 나 자신도 모르는 법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의 한계를 보았다. 그 한계는 불신을 가져왔다. 그것은 죽음친숙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개의 한계는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죽음에 친숙하거나, 또는 친숙해서 죽어 있거나,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토록 깨어 있으라!”고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친숙하거나, 친숙해서 죽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복음이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깨워보자. , 죽음의 한계(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갇히는 것)에 부닥쳐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고 있었다면, 너무나 친숙해져서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죽어 있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면, 그 한계 상황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우리의 존재를 던져 보는 것은 어떨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Do not be afraid any longer, only believe.” 그러면, 분명, 오늘 말씀처럼,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인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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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