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20. 05:26

현몽

(마태복음: 1:18-25)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아예 없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이 땅에 오신 일)을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묘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1-4 ㅡ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공부가 필요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조차 일관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잘 된 일이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다각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전해진다. 마리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마리아 주변에서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말해준다 (세례요한과 그의 엄마 엘리자베트, 그리고 그의 아버지 사가랴). 그 뿐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붙들고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도 보여준다 (시므온).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인 마태복음은 마리아의 남편요셉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오늘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은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 단계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부모(아버지)에 의해서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는 신랑과 신부가 어렸을 때 진행되는 일이다. ‘네 딸하고, 우리 아들하고 결혼시키자.’  둘째, 신랑과 신부가 성인으로 성장해 실제 결혼이 가까워졌을 때, ‘약혼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때부터는 서로의 관계가 법적 구속을 받는데, 이 관계를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적인 약혼 파기로만 가능하다. 약혼 기간은 대개 1년 정도 되며, 약혼 기간에 신랑과 신부는 육체적 접촉을 하지 않으며, 서로의 순결을 지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실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다. 이때 신랑은 큰 잔치를 벌이며,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이 문구에서 성령으로라는 말을 빼면,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에서 요셉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임신했다는 뜻이 된다.

 

요즘과는 달리,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혼 기간에 여인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임신하는 일은 통탄할 일이었다. 이것은 모세율법에 의하면 간음죄에 해당하는데, 이 죄는 죽음으로 다스려진다. 그 당시 약혼 기간에 간음죄를 저지른 여인은 돌에 맞아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하여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상식과는 다른 행동을 선택한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 이 문장 자체는 매우 비논리적이다. ‘의로운가만히 끊고자 하여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구절이다.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킨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그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간음한마리아를 돌로 쳐 죽였어야 한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간음한 마리아를 돌로 쳐죽이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그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의로움이란 단순히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은 율법의 문자를 넘어서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이다.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법이지, 생명을 죽이는 법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살릴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성이라고 증거한다.

 

그의 의로움의 절정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이 엄청난 일을 앞에 놓아두고, 요셉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마리아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정말 의로운 사람은 어떻게 살릴까를 고민하지, 어떻게 죽일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진실과 지혜는 바로 그 때 뜻밖으로하나님의 선물로 다가온다.

 

요셉은 이 일로, 아마도, 잠 못 이루며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고민에 지쳐 잠들었을 것이다 (영어로, drift off to sleep, 스르르 잠들다). 바로 그때, 요셉은 꿈을 꾼다. 성경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20). 요셉의 꿈 속에 주의 사자가 나왔다. 그리고 현몽한 사자는 요셉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니리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0-21).

 

문제적 심리학자, 프로이트라면 이것은 요셉의 무의식에 대한 표출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곤혹스러운 일에서 해방되고 싶은 요셉의 욕망이 표출되고 해방된 순간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경건한 심리학자, 융이라면 이것은 집단무의식에 대한 표출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최근에 발전한 뉴로사이언스는 이것을 잠자는 동안 일어난 마리아 임신 사건에 대한 요셉의 기억 통합 작용(memory consolidation process)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요셉의 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어떠한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다. 우리는 늘 실체를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 실체가 드러나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가령,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최순실 국정논단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그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한국의 역사는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이다.

 

현몽을 통해 마리아 임신 사건에 대한 실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간음 사건이 아니라, 성령 사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건이다. 이것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보충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

 

마리아 임신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뜻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은 꿈 같은 일이었다. 구약성경을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다. 구원은 그들에게 언제나 꿈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꿈 같은 일이 꿈을 통해서현실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이제부터 벌어진다. 꿈을 통해 진리가 드러났다. 그리고 요셉은 잠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24).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잠에서 깨어난 요셉이 이제 어떻게 행동하게 할까라는 것이다. 요셉의 의로움은 그러한 계시(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일)를 받은 것이 아니라(물론 의로운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계시도 받았겠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시가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 계시를 받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서 완성된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행동했다.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25). 참 조마조마한 이야기이다. 만약,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참 이상한 꿈이 다 있군하면서 그 꿈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그리고 율법대로 마리아를 돌로 쳐 죽였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역사가 바뀌지 않는 건, 또는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는 건, 꿈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는데도, 그것을 우리가 삶의 현실에서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책임공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힘들고, 사는 게 힘든 것은 모두 너 책임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로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약속 따로, 믿음 따로,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요셉은 행동의 근거를 경건(율법 또는 자기 의)이나 문화에서 찾지 않고, 믿음에서 찾았다. , 그는 믿음으로 행동했다. 그는 하나님에게 믿음을 두었고,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마음을 바꿨고, 행동을 바꿨고, 역사를 바꿨다. 믿음은 내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도 바꾸는 일이다. 만약 요셉이 마음만 바꿨다면, 그는 마리아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요셉이 마음은 바꾸지 않고 외적인 행동만 했다면, 그는 마리아를 데리고 왔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살다가 마리아에게 무슨 짓을 했을 지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믿음은 마음과 행동을 모두 바꾸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평화의 촛불을 켰지만, 왜 우리는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없이 하는 행동은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이고, 상대방에게도 상처가 된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새로운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교회 공동체니까 교회 공동체 내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왜 교회 공동체 내에 평화가 없는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5:23-24).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진리이고 실체이고 하나님의 계시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요셉은 진리가 드러났을 때, 실체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 마음(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역사를 바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진리의 말씀을 듣고, 형제에 대한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서, 역사를 만들며 사는가? 말씀을 통해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하는 행동만큼 허무하고 공허한 게 어디 있는가? 마음을 바꾸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행동으로만 마리아를 데리고 오니까, 평안도 없고 역사도 안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나와서 예배드리는 행위만 하니까 예배 드린 후에도 여전히 삶의 문제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고민 가운데 있고, 그 고민을 놓아두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어떠한 현몽(말씀, 계시, 실체)’을 받으셨는가? 성경에서 요셉은 현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지만, 우리는 일차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 삶의 문제가 있고, 구원이 간절하시거든, 우선 성경을 보시라.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뜻밖에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셨거든, 요셉과 같이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 보시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인,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시라. 주님께 마음을 두고, 주를 의지하는 자, 주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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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