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9. 3. 05:10

아버지의 마음

창세기 63

(창세기 48:8-22)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대동하고 아버지 병문안을 간 요셉은 두 아들이 그들의 할아버지 야곱에게 축복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죽음을 앞 둔 사람일 것이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마음만큼 간절한 마음은 없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은 그 자체가 힘이고 능력이고, 진실이다. 죽음을 앞 둔 아버지 야곱의 축복은 그 자체가 힘이고 능력이고, 진실을 넘어선 현실이었다.

 

죽음을 앞 둔 아버지와 죽음의 끝까지 가보았던 아들의 대화에는 이 세상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베어있다. 베토벤이 작곡했음 직 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그린 한 편의 서정적인 교향곡을 보는 듯하다. 요셉은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두 아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9).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소개한다.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은 그 자식에 대한 기대와 양육의 질을 바꾼다.

 

이 세상 어느 것도,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자식은 나의 생물학적 작용을 통해서 내가낳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자식은 철 없던 한 때 불장난으로 난 천덕꾸러기가 아니다. 자식은 아무런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실수로 낳은 짐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일단 생명이 태어나면, 그 생명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이므로, 그 생명을 잉태한 부모나, 그와 똑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이 땅에 온 모든 이들은 새로운 생명을 온 힘을 다해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요셉에게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자식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랬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버지 야곱을 통해서 임한다는 것을 요셉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부모는 자식의 축복의 통로이다. 그러므로, 자식이 예의를 갖추어 온전한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은 성경에서도 약속이 있는 계명으로 나타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20:12).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전통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의 전통이다.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한국의 정신 문화에서 는 그 중심에 있었다. 유학에서 강조하는 사람됨의 핵심은 ()’인데, 공자의 논어에 의하면 그 인을 이루는데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이다. 논어의 위정편에 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에 대한 이런 이야기까지 나온다.

 

어떤 사람이 관직에 있지 않은 공자에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서경]에 이르기를 효도하고 오직 효도하여 형제들에게 우애롭게 대하고 정치에 이것을 배풀어라라고 했으니, 이 또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어찌 벼슬을 해야만 정치를 하는 것이겠느냐?”

<출처: 김원중 옮김 [논어], 글항아리>

 

유학의 ()’ 사상은 기독교의 사랑(아가페)’과 비교할 수 있는데, 이를 기독교식으로 풀어 설명하자면, 사랑을 실천하는 바탕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게 잘 안 되면, 하늘의 복을 받기가 쉽지 않다. 동맥이 막혀 있는데 어찌 건강할 수 있겠는가. 가장 중요한 축복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어찌 하늘의 복이 시원하게 임하겠는가. 혹시, 인생이 잘 안 풀린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의 문제를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젊은 이들이 부모(또는 나이 많으신 어르신) 공경하는 일을 등한시 하는 이유는 그들을 공경하는 일이 남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부모를 공경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오직 부모를 위한 일, 어른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일들은 자신들을 귀찮게만 할 뿐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효를 행하는 것(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일)은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섭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은 모두 태어나서 성장해 살다가, 결국 늙어서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다(생로병사). 생명은 모두 늙는다. 생명은 모두 죽는다. ‘늙어감에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에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 효를 행하는 것은 남에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제 곧 늙게 될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더군다나 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현저하게 늘어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노년의 삶은 그 어느 시대에서보다 길어졌다. 옛날에는 노년의 삶이 별로 길지 않았다. 노년에 들어서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옛날에는 노년에 들어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인간이 누리는 복 중에, 장수의 복이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수의 복을 누리는 시대가 되었다.

 

노인 우울증의 대부분은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를 당하기 때문에 온다. 다른 말로 하자면, 노인으로서의 공경을 받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는 노인 자살의 수를 늘려가는 요인이다. 이러한 노인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노인 우울증 치료제를 개발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잃어버린 사상을 회복하는 것이 최선이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언 16:31).

 

늙어간다는 것은, 늙었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만 먹었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의 모진 풍파를 모두 견뎌냈다는 뜻이다. 그들은 존재에의 용기를 선택한 자들이고, 삶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들이고, 존경 받아 마땅한 면류관을 머리에 쓴 자들이다. 노인들의 백발은 액면가 그대로 흰색이 아니라, 그 안에 황금을 감추고 있는 영화의 면류관이다. 그러므로 부모님과 어른들은 존경 받아 마땅하다.

 

야곱은 아들 요셉과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베풀만한 영화의 면류관을 머리에 쓴 아버지요 노인이었다. 야곱이 베풀고자 하는 축복은 부끄러운 축복이 아니라 당당한 축복이었다. 야곱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들 요셉에게 그의 아들을 나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축복하리라고 말한다. 아들 요셉은 이렇게 당당한 아버지를 인정하고 있다. 요셉은 아버지가 축복하려고 하자 아버지 앞에서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

 

이렇게 부모가 자녀에게 인정 받는 길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인정 받을 때 그것만큼 복된 인생도 없다. 세상에서 인정 못 받았어도, 자녀에게 인정 받는다면 그 어떤 인정보다도 값진 것이다. 반대로, 세상에서 아무리 큰 인정을 받았어도, 자녀에게 인정을 못 받는다면 무슨 위로함이 있겠는가. 부모가 자녀에게 인정 받을 때, 하늘의 복은 자녀들에게 시원하게 임하게 된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베푸는 축복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한 가지는 장자 므낫세와 차남 에브라임에게 손을 얹을 때 팔을 엇바꾸어 얹는 것이다. 원래는 므낫세가 장자이므로 야곱의 오른손이 므낫세의 머리 위로 향해야 하고, 에브라임은 차남이므로 야곱의 왼손이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야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팔을 엇바꾸어 오른손을 에브라임 위에, 왼손을 므낫세 위에 얹는다. 또한, 야곱은 형식적으로 봤을 때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베풀고 있으나 그 내용 면에서는 요셉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요셉의 두 아들에게 손을 얹고 비는 야곱의 축복은 이후 제사장이 복을 빌 때 쓰는 형식의 전조가 된다. 야곱의 축복 기도문 형식은 유대교 의식에서 그대로 사용된다. 야곱이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직접 보자.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5-16).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하나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를 때,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야곱의 하나님은 뜬구름 잡는 하나님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야곱의 하나님은 무관심한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을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길러주신 하나님이시다. 야곱의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을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이시다. 야곱의 하나님은 이토록 구체적이다.

 

여기서 주목해서 봐야 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건지신(redeem)’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원어에서 가알이라는 말이다. ‘가알은 성경의 고엘이라는 말의 어원이다. 레위기 25장에 보면 고엘법이 나오는데, 이는 어떤 사람이 빚을 지거나 노예가 되었을 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이 돈을 대신 지불하고 풀려나게 해주는 율법(제도)이다.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고엘법의 수혜자는 룻기서의 주인공 모압여인 이다. 룻은 고엘법을 잘 알았고, 또 그 율법을 경건하게 지키고자 했던 보아스에 의해서 건짐(redemm)’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야곱에게는 그를 어려움에서 건져줄친족이 없었다. 형 에서와의 관계나 외삼촌 라반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에게 가알(건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야곱에게는 그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줄존재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았던 하나님은 실제로, 야곱의 신앙 고백과 같이, 야곱은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이것은 야곱의 절절한 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야곱은 두 아들을 데리고 병문안 온 아들 요셉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11).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할 야곱의 신앙 고백이다. 야곱은 사랑하는 요셉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야곱은 평생 요셉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한국의 유명한 희극인 송해 씨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데, 그 가슴을 파면 거기서 죽은 아이가 나올 것 같다.” 이처럼, 야곱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요셉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의 자식들까지도 그리하고 있다. 이 어찌 하나님께서 모든 환란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야곱이 팔을 엇바꾸어 축복을 하자 그것을 지켜보던 요셉은 아버지가 실수로 그렇게 하는 줄로 알고 아버지 야곱에게 오른손을 므낫세에게, 왼손을 에브라임에게 얹으시라고 정정해 준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19).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것이 아버지의 영력이요, 이것이 아버지의 권위이다. 아버지는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하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더군다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게다가 하나님의 기르심과 건져주심 가운데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신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야곱이 차남인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오른손을 얹은 것은 자신의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며 가슴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야곱도 차남이었다. 장남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야곱은 형 에서를 제치고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장자의 복을 받았다. 야곱이 살아온 세월은 바로 이것을 깨닫는 세월이었다. 눈이 안 보이고 병들어 죽게 될 초라한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으나, 야곱이 평생을 걸쳐 모진 인생의 고난 속에서 얻은 것,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겨주고 갈 유산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아버지 야곱의 마음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었다. 이런 아버지가 내리는 축복은 허공을 가르는 허언이나 요행을 바라는 공염불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축복은 그 자체가 힘이고 능력이고, 진실을 넘어선현실이다.

 

야곱은 이렇게 축복을 마무리 한다.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20-21). 훗날, 야곱의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에브라임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 시기에 여호수아를 배출하는 등 이스라엘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요셉은 세겜 땅에 묻히게 되고, 결국 애굽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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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