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7. 9. 06:07

야곱의 유언

창세기 61

(창세기 47:27-31)

 

갖고 온 게 없는데

뭘 가지고 가겠어

 

생각해봐, 그 어렵던 시절

 

생명보다 죽음을 먼저 알았고

평화보다 침략을 먼저 알았고

사랑보다 전쟁을 먼저 알았고

神보다 미신(迷信)을 먼저 알았고

 

그러나 생각해봐, 살아온 시절

 

생명을 만났고

생명을 낳았고

평화를 누렸고

평화를 남겼고

사랑을 입었고

사랑을 나눴고

()을 배웠고

()을 전했고

 

갖고 온 게 없는데

뭘 가지고 가겠어

   

그만큼이면 됐어 그러니

내 누울 자릴랑 남겨두지 말고,,,,,,

                             

불에 태워 한 줌의 재로 만들어

우면산(牛眠山) 기슭에서

마주보며 살게 해줘

 

장준식, <유언> 전문

 

이것은 선친의 유언이 담긴 시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는 죽음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직감이 있는 듯하다. 물론 아버지께서 의사로부터 8개월정도 후에는 생을 마감하게 될 거라는 ‘사형선고’를 받으신 영향도 있겠지만, 사람은 죽기 전까지 죽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 살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살더라도, 인간은 언제 죽게 될지 그 정확한 시간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 안에는 보이지 않는 직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본인이 언제 죽게 될지 그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에게서 정을 뗐다. 일부러 정을 뗀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정을 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말로 얼마 뒤,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자신이 죽으면 매장하지 말고 화장을 해서 우면산 기슭에 뿌려 달라고만 했다. 화장이 그렇게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죽은 뒤 화장해 달라고 고집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매장하면 산소를 찾아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자녀들에게 남기는 것인데, 아버지는 그러한 번거로움마저 자녀들에게 지우고 싶지 않아 했다. 물론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가 죽은 뒤 화장해서 그 유해를 납골당에 모셔놓고 일부를 우면산에 뿌렸지만(모든 유해를 야산에 뿌리는 것은 불법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후회되는 건 아버지의 유언을 곧이곧대로 들어드린 것이다. 아버지 산소가 없으니까, 아버지가 정말로 아무데도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사는 게 힘들어서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어디를 찾아가서 ‘아버지’를 부르며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유언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긴다. 아버지는 참 소박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그 무엇에 욕심 부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지막 유언도 ‘가지고 온 게 없는 뭘 가지고 가겠어!’라며 자신의 산소조차 만들지 말라고 했다. 죽은 뒤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크게 알리고자 산소를 멋지게 꾸미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자신의 산소조차 만들지 말라며, 자녀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것이 평생 소박하게 살아온 아버지가 후손들에게 남긴 마지막 교훈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욕심부릴 수 없다. 소박함을 거부할 수가 없다.

 

야곱도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애굽 땅에 거주 한 지 17년이 지난, 그의 나의 147세 때의 일이다. 죽음을 직감한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실질적으로 장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아들 요셉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유언을 전한다. 그의 유언은 장황하지 않다.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29-30).

 

야곱의 유언식은 매우 준엄하게 진행된다. 야곱은 요셉을 불러들인 뒤, 유언을 말하기에 앞서 요셉에게 자신의 유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인식시키고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29).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자신의 유언을 준엄하게 실행해 줄 것을 부탁한다.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는 행위는 그 옛날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러 그의 종을 하란 땅으로 보내면서 행했던 의식과 똑같다. 이런 ‘의식(ritual)’은 그 일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같은 말을 해도, 같은 행동을 해도 일상에서 하는 것과 ‘의식’ 안에서 하는 것을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닌다. 어떠한 특정한 말과 행위는 ‘의식’ 속에서만이 우리의 내면 깊이 의식화(意識化)된다. 의식(ritual)은 어떠한 것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는 일을 한다.

 

야곱의 유언, 즉 “내가 죽거든 너는 나를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가나안땅)에 장사하라”는 유언은 야곱에게 있어 단순한 유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험악한 세월’을 견뎌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그렇게 험악한 세월을 견디며 산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다. 야곱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야곱은 그 ‘험악한 세월’을 그토록 잘 견뎌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그의 ‘험악한 세월’을 끝까지 잘 견디도록 해 준 버팀목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 땅에서 그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실 거라는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귀향’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끝까지 기대어 사는 그의 사명이었다. 게다가 야곱은 요셉의 인도를 따라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오면서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 시도 잊지 않았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46:4).

 

한 사람이 죽기 전, 그가 남기는 유언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유언에는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가 담길 수 밖에 없다. 마지막에 먹는 음식은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음식일 것이고, 마지막에 방문하고 싶은 장소는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일 것이고, 마지막에 만나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남기는 말(유언)은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가 담길 수 밖에 없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야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약속)이었다. 그가 왜 아브라함과 이삭에 이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그의 유언이 증명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일컬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일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을 부를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것은 요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원리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것은 그렇게 세속적인 뜻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리 겨루어도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뜻은 무엇인가?

 

야곱의 유언이 그 뜻을 보여준다. 야곱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다. 이사야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28:16). 조급한 마음과 서두르는 마음은 모두 확신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확신이 있는 사람, 믿음 가운데 거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고 믿는 이는 절대로 서두르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를 기다리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자신을 밑거름으로 내놓는다.

 

야곱의 유언은 단순히 자기 자신만의 소망이 아니다. 야곱의 유언은 ‘비록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내려왔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귀향>하게 될 거’라는 믿음의 확인이다. 만약 야곱의 유언이 준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면, 창세기의 뒤를 잇는 <출애굽기>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비록 4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지만, 야곱은 믿음의 눈으로 미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마중물’이 되어 그의 자손들에게 일어날 일, 즉 가나안 땅으로의 회귀를 자신의 유언을 통해서 미리 실현했던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 11:1). 야곱의 유언은 단순한 ‘말 남김’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었다. 그의 유언은 그의 인생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붙든 삶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믿음의 증거였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는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일’은 재수없는 행위일지 모른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유언이란 기껏해야 자신이 가진 물질을 어떻게 분배할지에 대한 진술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언은 결코 세속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언은 야곱의 유언처럼 ‘자신이 믿어온 바’에 대한 신앙고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말씀을 받았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떠한 유언을 남길 것인가.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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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