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21. 01:22

우리는 누구의 양인가?

(요 10:22-30 / 9:36-43)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을 맞았다. 부활절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주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이 땅에 오시는 성령강림절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하여 부활절기를 지킨다.

 

예수의 부활은 유일회적인 엄청난 사건이다. 세상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사건이다. 인류 역사에서도 보면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역사적 창조사건이 즐비하다. 그런 역사에는 혁명이라는 말을 붙여 표현한다. 예를 들면, 농업 혁명(농경 사회로의 전환 à 수렵 생활 하다, 이제 한 곳에 머물러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 바퀴 혁명(운송 수단의 발달, 생활 반경이 넓어졌다), 산업 혁명(기계의 발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인간소외 현상이 발생했다), 과학 혁명(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신화적 세계관 à 과학적 세계관, 달에는 더 이상 방아 찧는 토끼가 살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혁명은 인간의 생활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가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하나님은 왜 예수를 부활시키셨는가? 부활은 악(불의)에 대한 선(정의)의 승리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매일 보는 악이다. 그 악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기지 못한다. 부활이 그것을 증거한다. 세상의 악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예수는 다시 사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심판하시고 이기셨다. 이 사건을 보면서, 악하게 사는 자, 불의를 행하는 자, 힘이 좀 있다고, 돈이 좀 있다고, 배운 게 좀 있다고 교만하게 굴던 자들은 모두 회개하고 선하게 살기로 결단해야 한다.

 

참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자만이 신적인 생명인 영생을 누리게 된다. 영생은 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사는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삶, 즉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저 천국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산다.

 

구원이란 이 땅에서 불의하게 죄짓다(쉬운 말로 개같이 살다), 어쩌다 예수 믿어서 저 세상에 있는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 사항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전한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제 이 사실 앞에서 우리의 할 일은 이것을 믿든지, 안 믿든지 하는 것이다. 이것을 결단이라 한다. 신앙은 결단 행위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기로 결단한다면, 예수의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세상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고, 예수의 부활을 못 믿겠다면 우리는 여전히 불의와 죄가 가득한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하고 죄가 가득한 곳인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날마다 겪는 일이다. 게다가, 누군가에 의해 아픔을 당해보면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하고 죄가 많은 곳인가를 뼈저리게 알 수 있게 된다. 전쟁, 학살, 억압, 불법, 구체적으로는 위안부 문제’, ‘세월호 참사등을 들여다 보면, 이 세상의 악함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게다가, 우리가 이렇게 살다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우리의 삶은 참으로 비참하게 만든다.

 

예수의 부활은 이 모든 비참함을 완전히 바꾼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다.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고 편리하게 하는 일은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지만, 그래서 그렇게 혁명을 통해 해왔지만, 그 모든 것 안에 스며 있는 비참함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부활이다. 이것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양을 비유로 들어 복음을 믿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이 아닌 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 우리는 누구의 양인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예수님의 양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욥바라는 도시에 살던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를 여제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예수를 믿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 나서기로 결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비다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헬라식으로 번역하면 도르가이다. 뜻은 암사슴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살았던 이 사람을 규정 짓는 문장은 길지 않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who was always doing good and helping the poor.” 그런데, 그에게 힘든 일이 발생했다. 그에게만 힘든 게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37).

 

도르가(다비다)가 죽자, 주변에 함께 예수를 섬기던 또다른 제자들이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서 가까운 룻다라는 곳에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욥바로 모셔 온다.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해서 죽은 도르가에게 나아갔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베드로를 붙잡고 도르가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울었고, 도르가가 살아 있었을 때에 그들에게 어떻게 선행을 베풀었은지, 증거를 보여주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39).

 

베드로는 그들의 소망을 꺾지 않는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이렇게 외친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랬더니,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것을 보며, 어떤 이는 거짓말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안 믿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러나, 그렇게 싸우는 것은 하등의 도움도 안 되고, 필요도 없다. 지금 여기서 성경이 전하고 있는 내용은 다비다가 실제로 죽었다 살아났는지 아닌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에서 부활의 역사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가 도르가를 향해 기도하며 다비다야 일어나라한 것은, 그가 다비다, 즉 도르가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새로운 피조물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기도 대로 도르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워주신 하나님께서는 도르가의 선행을 인정해 주시는 거다. 핵심은 이거다. 지금 여기에서는 죽은 도르가가 다시 살아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 ‘부활의 역사’(선하고 아름다운 일)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 자들의 삶은 완전히 바꾼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양을 잡아 먹던 삶에서, 양을 먹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삶으로 바뀐다. 때로는 놀부처럼 이것을 위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은 도르가 사건에서처럼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 자들의 삶은 꿈이 바뀐다. 그것은 오늘 주보에도 실은 두 사람의 삶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마르크 슐츠와 조나단 에드워즈.

 

예화)

 

미국의 개척사에 보면 18세기 초에 두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배를 타고와 신대륙인 미국에 내렸습니다. 한 젊은이는마르크 슐츠’(Marc Schulze)이고 다른 젊은이는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 1758)입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신천지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지만 그들의 꿈은 달랐습니다.

 

마르크 슐츠의 꿈은이곳에서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 내 자손은 가난을 모르게 부를 자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뉴욕에다 술집을 차려서 열심히 일하여 그의 꿈대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당대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나는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음으로 신앙이 자유로운 이곳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라 고 생각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150년이 지났고 5대 자손들이 태어났습니다. 뉴욕의 시교육위원회에서는 세간에 자주 이름이 거론되는 두 사람의 가계를 조사하기 위해 그 자손들을 추적 하여 조사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큰돈을 벌어 자손들을 잘 살게 해주겠다는 꿈을 가진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낳았는데 그 자손들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교도소에 서 5년 이상 형을 산 자손이 96.

- 창녀가 된 자손이 65.

- 정신이상이나 알코올 중 독자가 58.

-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가 460,

- 정부의 보조를 받는 극빈자가 286명이었고

그 자손들이 정부의 재산을 축낸 돈이 15천 만 불(1800억 원)이었습니다.

 

한편,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앙생활을 한 조나단 에드워즈느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을 당대에 설립하였고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퍼뜨렸습니다.

 

- 자손들 중에 선교사 목사가 116

- 예일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교수, 교사가 86, 군인이 76,

- 국가의 고급관리가 80, 문학가가 75, 실업가가 73, 발명가가 21,

- 부통령이 한사람, 상하의원 및 주지사가 나왔고,

- 교회 장로와 집사가 286명 이 나왔답니다. 도합 816명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조나단 가문은 국가에 낸 세금과 지도자로서 미국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정부 재산을 하나도 축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화 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 자들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돈 버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도 전혀 아니다. 예수님의 양은 꿈이 달라진다. 예수의 부활을 믿기 전에는 나의 성공을 위해 양을 잡아 먹는데 혈안이었는데, 이제는 삶의 방향 자체가 달라진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자기를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놓을 줄 알게 된다. 도르가처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사람이 된다. 그야말로,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게 한다.

 

베드로와 도르가는 예수님의 제자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으로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의 부활의 역사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자기 자신을 헌신했다.

 

우리는 누구의 양인가? 우리는 무슨 꿈을 꾸고 사는가? 양을 잡아 먹고 있는가? 아니면 양을 먹이고 있는가? 내가 있는 곳에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가? 한 번 따라 해보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주님의 양! 주님, 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 새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꿈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그 안에서 부활을 사시는 믿음의 자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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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