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29

교회의 터 (바울의 교회론)

(고린도전서 3:16-23)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600장에 보면 <교회의 참된 터는>이라는 찬송이다. 거기의 첫 가사는 이렇다.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라 그 귀한 말씀 위에 이 교회 세웠네 주 예수 강림하사 피 흘려 샀으니 땅 위에 모든 교회 주님의 신부라.”

 

이 찬송은 우리가 오늘 살펴볼 고린도전서 3장 중에서 11절을 가사화한 찬송가이다. 고린도전서 311절은 이렇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며,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린도교회는 파당이 여럿 있었다. 하나는 바울파, 다른 하나는 아볼로파, 또 하나는 게바파이다.

1) 바울파: 유대교 율법주의와 전통적인 헬라철학에 거부감을 가졌던 그룹

2) 아볼로파: 엘리트 그룹, 인간의 지혜와 세상 학문 강조

3) 게바파: 유대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들의 그룹, 율법중심주의

 

, 고린도교회 분열의 근본 원인은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그 터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아볼로파는 세상이 지혜 중심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을 거시고, 게바파는 율법을 중심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터로 삼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교회의 터로 삼는 우매함을 보인다.

 

우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교회 내에 존재하는 신령한 자들육신에 속한 자들에 대하여 말한다. ‘신령한 자들이란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들이다. 사실, 교회에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평안하겠는가? 그런데, 현실교회에는 육신에 속한 자들도 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이란 믿기는 하지만 성령보다는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이게 고린도전서 31절과 2절의 내용이다.

 

신령한 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살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산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 이것은 갈라디아서 522절에 아주 잘 나와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와는 대조적으로, ‘육신에 속한 자들이 맺는 육신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19-21절에 잘 나와 있다. “육신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들은 안 믿는 자들이 아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믿기는 믿되, 아직도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자들을 말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런 자들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의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어린아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 자라지 못한 존재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함이지만, ‘어린아이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리스도 안에서 망나니’.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주목하는 육신의 열매시기와 분쟁이다.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가장 큰 문제가 시기와 분쟁이었다는 뜻이다. 각 파당끼리, 서로 시기와 분쟁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에 평안이 있었겠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내세우고 있는 원리가 십자가의 도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강조하기를, 각 파당이 추종하고 있는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는 추종의 대상이 아니라 사역자들이라고 한다. 사역자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이는 주의 복음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는 서로 경쟁이나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는 것이다.

 

사역자를 추종하지 마시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된, 새로운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이다. 사역자를 추종하지 말고,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라. 주의 복음을 위해 서로 섬기고 봉사하시라.

 

사도 바울은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통해서 세워져 가는 교회를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9). 여기서 하나님의 밭은 수많은 곡식과 열매를 기대하게 하고, ‘하나님의 집은 가족과 평안과 보호를 생각하게 하는 비유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곡식과 열매를 맺는가?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가족, 평안, 보호’, 이러한 단어가 떠오르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이 더 쉬운지 아시는가? 사실, 사역자를 추종하는 것이 더 쉽다. 그리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사역자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게 가장 어렵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를 예수 그리스도로 하더라도, 각기 다른 건축 자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생각해 보자. 건축의 질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건축자재로 결정 난다.

 

<돼지삼형제>라는 동화를 아실 것이다. 돼지삼형제가 살았는데, 각자 집을 지어 살았다. 첫째 돼지는 초가집을 지었고, 둘째 돼지는 나무로 된 집을 지었고, 셋째 돼지는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집을 지었다. 늑대가 돼지삼형제를 잡아 먹으러 왔을 때, 첫째 돼지의 초가집과 둘째 돼지의 나무집은 늑대의 초강력 바람에 훅 날아가버리다. 그러나,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셋째 돼지네 집은 늑대의 초강력 바람을 견뎌내고, 결국 돼지삼형제를 늑대로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준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비유를 쓴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13).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의 건축 자재를 말한다.

1) ,,보석: 이것은 최고의 건축재료이다.

2) 나무: 이것은 보통의 건축재료이다.

3) 풀이나 짚: 이것은 임시 건축재료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건축 자재는 성도들의 교회생활의 질 또는 믿음의 질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최고의 건축 자재인 금,,보석으로 집을 짓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건함과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 가운데 기쁨으로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보통의 건축 자재인 나무로 집을 짓듯이, 특별한 열심이나 정성 없이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임시 건축 재료인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듯이,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불신자들과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지금 내가 어떠한 건축 자재로 성전을 지어 신앙생활(교회생활)하고 있는지는 위의 돼지삼형제의 이야기에서처럼, 바람이 훅 한 번 불면, 하나님의 불(시험, 연단)이 한 번 임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14, 15).

 

엉성한 건축 자재로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침을 준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6, 17).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지적하고 있는 교회공동체 최고의 적으로 자기 자랑 그리고 자기기만을 지목한다. ‘자랑은 고린도교회의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자랑의 핵심은 세상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보이는 현상이 자기기만이다. 기만이란 속이는 행위인데, 자기기만이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신앙생활(교회생활)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파당을 짖고 분쟁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스스로 속이는 자들, 즉 스스로 속고 있는 자들, 자기의 지혜, 지식이 얼마나 형편 없고 조잡하고 어리석은지 모르고, 자기의 지식과 지혜가 맞다고 착각하여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런 자들을 자기기만에 빠진 자들이라 한다.)은 약도 없다. 전형적인 사람들이 기독교 이단들이다. 그리고 스스로 도를 깨우친 양 공동체와 섞이지 못하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18절에서 20절의 말씀에 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우리가 알듯이,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지혜가 되고 구원이 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교회의 터를 삼고 있는가? 우리는 때로, 교회는 이래야 돼, 저래야 돼, 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토대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한다. 교회의 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앙은 절대적으로 이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건축 자재를 통해 교회를 세워 나가는가? 금은보석?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있는가? 나무? 특별한 열심이나 정성 없이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풀이나 짚? 불신자들과 거의 구별이 안될 정도로 신앙생활 하는가?

 

우리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자.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는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의 평안 가운데 살게 될 줄로 믿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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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