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4. 11:54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요한복음 20:19-23 / 사도행전 5:27-32


부활한 이후가 더 문제이고, 더 중요하다. – “진짜 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껴? 또는 (줄여서) 이젠 어쩔껴?”

 

아이를 갖고 싶은 부부가 아이가 잘 안 생겨서 고생했는데, 어느 날은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아이가 생겼다고! 그러면 이제 그 부부는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 당연히, 아이를 잘 키울 생각을 해야 하고, 이제 부모로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이들에게 아이가 생겼는데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이를 잘 키울 생각도 안 하고, 부모로서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도 불쌍해지고, 부모도 불쌍해진다.

 

어떤 사람이 좀 몸이 안 좋아서 그 증상에 해당하는 병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암이었다. 너무 놀라서 그는 병원을 찾아 정밀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다행히 암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괜히 걱정했네.’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려했던 대로 위의 사람이 암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야, 나는 암에 걸린 게 아니야. 병원 진단이 잘못 된 거야. 별 문제 없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잖아. 나는 암에 걸린 게 아니야. 그럴 리 없어.’하면서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받아 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행복의 첫 걸음, 책임 있는 인생, 의미 있는 삶을 향유해 가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자신의 현실(현재)있는 모습 그대로받아 들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번민하는 이유는 자신의 현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신의 현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과 타협하고, 자포자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의사들에 의하면, 대개 암 환자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암환자에게 의사가 환자분에게는 암이 있습니다라고 전하면, 암환자의 처음 반응은 이런 것이다. ‘내가 왜?’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도 똑 같은 반응을 한다. 사랑하는 이들(자식이든, 남편이든, 여기서 예외는 부모님이다.) 갑자기 죽었을 때, 또는 예상치 못하게 죽었을 때 사람들은 대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어 한다. ‘? 내 아이가 왜? 내 남편이 왜? 내 아내가 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힘들어 하는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나 병에 의해서 자기 몸에 장애가 생긴 사람들이라고 한다. ‘내가 왜?’

 

어떠한 일들은 모두 가능성이다. 임신, , 갑작스런 상실(죽음), 장애. 문제는 그러한 가능성이 진짜 나의 현실에서 발생한 후의 삶이다. “진짜 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껴? 또는 (줄여서) 이젠 어쩔껴?” 우리의 인생은 사건이 발생한 후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불행과 행복의 갈림길에 여기에 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인이 죽임을 당할 것과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게 될 거라는 것을 몇 번 말씀하신다. 그때만 해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냥 가능성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그 일이 정말로 벌어졌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것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부활하셨다! 이것을 믿으시는가?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가? 그게 쉽지 않는 거다. 오늘 말씀에서도, 부활하신 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나타나신다.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붙잡혀 십자가 처형 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숨어 있었다. 바로 그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이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은 아마도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당연하다. 두려워 떨고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강이다.

 

정말로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부활하셨다. 현실이었다. 제자들이 그것을 있는 모습 그대로잘 받아 들였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매우 잘 알려진 의심 많은 도마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전한다.

 

우리도 얼마든지 의심 많은 도마가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나도 도마처럼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과 옆 구리에 난 창 자국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면 믿을 수 있을 거야!’ ㅡ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거나,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하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발생하면 우선 믿지 않는다. 위에서 충분히 말씀 드렸다. 현실 거부가 일어난다. 자신의 다리가 잘려 나간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다리가 잘려 나간 것을 믿지 않으려 든다.

 

우리는 의심 많은 도마의 이야기를 보면서 도마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거참,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더니 믿음이 별로 없네.’ 전혀 그렇지 않다. 도마는 훌륭한 사람이다. 도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보고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가 과연, 도마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는가?

 

그렇다면, 제자들은 다른 이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부활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바로 그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자.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1, 22).

 

성령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도 통할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있는 모습 그대로볼 수 없다.

 

예수께서 일으켜 지셨다. 스스로 사는 게 아니다. 스스로 죽음에서 벌떡 일어서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 주시는 거다. ,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러니, 믿음 없으면 그 하나님의 일이 눈에 안 들어 온다.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보고도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다.

 

여러분에게 질문한다. ‘성령 받으셨는가?’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선,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면, 벌어진 일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성령 받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인생을 살아간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죽었겠는가. 저 사람을 믿지 못하는데 나의 몸을, 나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가. 은행을 못 믿는데, 은행에다가 돈 집어 넣을 수 있나. 투자할 수 있나. 사기 당하기 십상이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세 가지가 생긴다. 평강, 담대함, 능력. 당연하다. 하나님을 믿는데, 이 마음에 평강이 없을 수 없다. 하나님이 손잡아 주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데, 그런 능력의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데 평강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거다.

 

삶이 불안하신가?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니, 불안해 하지 마시라. 마음에 평강이 오면, 그와 동반되는 것이 담대함이다. 담대함이 어떻게 표출되는지는 사도행전의 본문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까 봐 두려워서 숨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뒤, 그들은 담대하게나아가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들의 담대함을 보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거의, ‘죽일 테면 죽여봐라!’라는 태도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공회에 잡혀 갔던 베드로와 사도들은 담대하게 그들과 맞서 복음을 전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능력이 생긴다. 능력이란 창조성을 말한다. 없던 일이 생기거나, 안 되던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능력을 오해하면 안된다. 능력을 가지면,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하늘을 날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돈을 많이 벌게 되거나, 잘린 손이 다시 생겨나거나, 암이 낫거나,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능력을 가지면,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땅에서 열심히 살게 되는 것, 복권에 당첨되지 않아도 되도록 열심히 일하는 것,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알뜰살뜰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 잘린 손이 다시 생겨나지 않더라도 나에게 손이 하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 암이 낫지 않더라도 그 암으로 인해 죽게 될 것을 인정하고 인생을 의미 있게 마무리 하는 것,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죽은 이의 넋을 기리며 그 사람의 몫까지 열심히 사는 것, 이런 것이 오히려 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 부활의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 안에서 부활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예수님께서 그러셨 듯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받고,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변화, 능력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문제, 이웃의 삶의 문제, 이 세상의 악함,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일들, 이런 것들을 놓아두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잠을 이기게 되고, 게으름을 이기게 되고, 분주함을 이기게 되고, 세상의 정욕을 이기게 된다.

 

사도행전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시(한 시간, one hour)’도 깨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얼마나 기도에 힘쓰게 되는지 나온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3:1). 그러다, 이들이 다리 불구자를 고치는 역사까지 벌인다. 기도의 사람이 되는 능력이 임하길 바란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아시겠는가?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의 부활을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을 받아 예수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인 자의 삶은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삶이 된다. 평강과 담대함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는다. “진짜 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껴? 또는 (줄여서) 이젠 어쩔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현실을 직시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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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