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30. 05:25

죽음은 생명이다

(마가복음 14:1-11)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죽음은 인류 최후의 원수이다. 인류는 죽음이라는 실존과 함께 살아 왔고, 살아가야 한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죽음에 대한 대항 또는 저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나,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르는 것이 죽음이다.

 

종교는 죽음에 질문을 통해서 탄생했다. 그러므로, 어느 고등 종교이든지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답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그리고, 신은 죽음을 경험하는 인간과는 달리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의 신 이해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우리가 증거하다시피,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서 발생한 종파도 있다. 대표적인 종파가 영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더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그러한 도전과 난점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발전된 교리가 삼위일체교리이다. 삼위일체교리는 신의 죽음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다. 삼위일체교리로 인해, 기독교는 신이 죽었다는 것신이 살아 있다는 두 가지의 주장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는 온통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예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까 음모를 꾸몄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이름 모를 여인의 행동에도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것이었고,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가룟 유다도 죽음의 음모에 동참하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모두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다. 이 말에 빗대서 죽음을 설명해 본다면, ‘죽는다는 본질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이해는 저 마다 다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는 크게 네 사람이 등장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향유를 부은 여인, 가룟 유다, 그리고 예수님이다. 우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죽음은 어떠한 의미일까?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이 그러한 음모를 꾸민 이유는 예수가 자신들의 삶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자기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냥 도구일 뿐이다. 이런 자들에게 죽음은 폭력의 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들에 의하면, 죽음은 폭력에 불과하다. 죽음에 대한 최고의 저급한 이해이다.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여인은 값비싼 나드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다. ‘나드는 인도산 최상품 발향성 기름이다. 매우 값비싼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머리에 나드를 부은 이유는 예수님의 설명대로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이다. 그녀에게 죽음은 매우 신성한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신성한 것이다.

 

이것은 보통 인간들이 죽음에 대하여 갖는 마음이다. 죽음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성함이 들어 있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에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22권에 보면,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 나온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의 시체를 내어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은 장례를 지내는 동안 전쟁을 멈추기로 협의한다. 그들이 전쟁을 멈춘 이유는 그것이 죽음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을 숙연하게 한다. 넘어설 수 없는 신성함이 죽음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에게 죽음은 다른 의미를 지녔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의 음모에 가담하여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 한다. 가룟 유다가 음모에 가담한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같아서가 아니다. 가룟 유다는 젤롯당원이었다. 젤롯당은 무력을 통해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민족을 구원하길 바랐다. 가룟 유다가 희망한 메시아 상은 예수가 스스로 드러낸 메시아 상과 달랐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죽음에 몰아 넣음으로 예수가 자신들의 원하는 메시아 상의 모습을 보이기 바랐다. , 가룟 유다에게 죽음은 어떠한 일을 추진하기 위한 동기(Motive)로 작용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도 사람들이 보통 갖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무슨 일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또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큰 동기를 불어 넣어 준다. 대개 인류 역사에서 큰 업적을 이루어 낸 위인들은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넘어섰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그 죽음과 같은 열악한 신체 조건을 넘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곡들을 작곡했고, 모차르트는 생활고에 시달려 굶어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악보를 썼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음악을 낭만적으로 듣고 있지만, 그들이 지어낸 음악은 낭만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죽음은 어떠한 의미였을까?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왜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고,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그게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불가사의 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이 삶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이해를 가지고 살아간 것을 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고난과 죽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우리에게 건네 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아니 그야말로 새창조의 사역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기 전까지, 제자들이 죽음에 대하여 보인 반응은 일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죽음을 무서워했고, 그들은 죽음을 이용했고, 그들은 죽음을 신성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도망쳤고, 그들은 배반했고, 그들은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을 때, 그들은 죽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죽음은 단순히 인간의 삶과 분리된 부정의 영역, 즉 하나님의 통치 바깥에 있는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영역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위에서 말했듯이,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과 죽음은 상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자리를 피해서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의 한 가운데서 그 죽음을 당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말은 죽음 또한 하나님에게 속한 생명의 활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은 여느 사람이 비방하듯 자살행위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가장 부정적인 것(죽음)을 가장 긍정적인 것(생명)으로 새롭게 창조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 이후,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죽기 때문에 부정으로 떨어지지 않고 긍정으로 승화되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지 않았다. 죽음을 불의하게 이용하지도 않았고, 죽음 때문에 배반하지도 않았으며, 죽음을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여 멀리서 바라보지도 않았다. 사도행전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어떻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꼭꼭 숨어 있던 제자들은 광장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2:14). 제 삼시는 오전 9시다. 이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생계를 위하여 부지런히 움직일 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에게는 죽음도 생명이다.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을 더럽게 이용하지도 않을 뿐더러, 죽음을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새창조에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죽음으로 불리지 않고 생명으로 불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참 자유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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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