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과학시대의 기독교

 

인간은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니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가령 신화적 세계관과 가부장적 가치관을 지닌 자의 삶과 과학적 세계관과 탈가부장적 가치관을 지닌 자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과 가치관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맞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이해이다(이를 종말론 또는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역사발전을 논했고,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헤겔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마르크스도 역사발전의 주체를 투쟁계급(프롤레타리아)로 정했을 뿐, 큰 틀에서 역사발전의 방향에서는 헤겔의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1,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보면서, 그리고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대학살의 참상을 보면서 인간 지성은 이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고, 새로운 종말론의 도입을 갈망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신학자가 칼 바르트이고, 그는 기독론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말의 시대를 열어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르트는 종말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의 사후, 그의 종말론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이가 몰트만이다. 다행히도 몰트만은 바르트의 맥락에서 기독교 종말론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제는 바르트에서 시작해 몰트만에서 완성된 기독교 종말론만으로는 이 세계의 종말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바로, 과학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이점을 간파한 몰트만도 바르트의 맥락에서 완성시킨 종말론 이후에, 과학과의 대화를 통한 새로운 기독교신학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중이다(그래서 나온 책이 <과학과 지혜>이다).

 

우리는 어떻게 끝을 맞게 될 것인가?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재림이 역사의 종말을 가져올 거라고 주장하지만, 과학적 발견이나 과학기술의 발달은 기독교의 그런 주장에 대해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과학의 발견에 의하면, 예수의 재림이 아니더라도 45억년만 더 있으면 태양이 수명을 다해 어차피 태양의 폭발과 함께 지구는 끝을 맞이 하게 된다.

 

게다가, 구글의 미래학자 레이먼드 커즈와일에 의하면, 인류는 2029년 정도 쯤 눈부신 과학기술 덕분에 영생을 얻게 될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과 영생은 과학에서 말하는 종말과 영생과 어떻게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

 

이게 단순히 성경을 들이대며 과학의 주장은 마귀의 주장이라고 우겨서 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지금도 '창조과학회'라는 꼴통보수 집단을 필두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지만...) 신학은 확정된 진리가 아니라 '되어져 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과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절대적으로 민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학은 사이비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어떠한 세계관과 어떠한 가치관을 지니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뭘 잘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예수의 재림과 함께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게 될 거라면 우리는 뭣하러 우리의 인생을 열심히 살겠는가? 광신도들처럼 다 집어치우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 될 것을.

 

반대로, 과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45억년 후에 생명이 자연적으로 멸망 당하게 되거나,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곧 영생의 순간을 맞게 된다면,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 기독교의 종말론(구원론)은 과학의 종말론(구원론)과 어떠한 일치도 없으며 오직 적대적인 관계를 견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과학시대를 살아가며 과학이 주는 편리와 풍요를 다른 인류와 똑같이 누리며 사는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과학이 말하는 종말과 영생의 문제, 즉 구원의 문제를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만약 기독교가 과학의 문명을 누리면서 과학의 성과에서 비롯되는 문제제기를 등한시한다면, 이는 물 속에 살면서 물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 안 하다가 물이 더러워져 또는 물의 환경이 변해 거기에 적응 못하고 죽는 물고기와 다를 바 없는 종국을 맞게 될 것이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요, 오직 역사의 흐름과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한 자만이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을 좋아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현재 한국 교회는 의지력만 기르고 있을 뿐, 그 어떠한 개념 확립에도 매진하고 있지 않다. 체질은 의지력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개념의 확립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가장 시급하고도 절실한 문제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줄 개념, 즉 세계관과 가치관의 확립이다. 21세기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맞게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게 될 것인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