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23

부활이란 무엇인가?

(고전 15:12-19)

 

일단, 부활이란 무엇인지를 오늘 다 말할 수도 없고, 평생을 다 말해도 알 수 없는 것임을 먼저 말씀 드리고 싶다. 우리는 부활 자체를 안다기 보다,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부활을 알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는 부활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다.

 

우리는 금요일에 성금요일 예배를 드렸다. 성금요일을 영어로 ‘Good Friday’라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오면서, 엄마가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Good Friday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이다.” 그랬더니, 작은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Good이야?”

 

아이가 똑똑한가? 사실, 똑똑하다기 보다, 순진한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도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도 아이이다. 그만큼,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봐야, 세상은 더 잘 보이는 법이다. , 아이처럼 우리는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먹는다는 것은 질문할 줄 모른다와 동의어다. 나이를 먹으며 질문이 줄어드는 이유는 세상에 대하여 많이 알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눈과 귀를 닫기 때문이다.

 

어떤 분과 카톡으로 나눈 대화인데, 좋은 교육 교재가 될 수 있기에 사용한다.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마시라. 이분을 정죄하기 위해서 이것을 사용하는 게 아니다. 순전히 교육용으로 쓰는 것이다. 오타는 내가 수정한 것이다.)

 

잘 보았습니다. 부활이란 죽었다 다시 사는 것인데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은 부활이 아닌 것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요. 인간의 풍습으로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은 진정한 참 숭배가 아님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승인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기념하라고 부탁하심을 그저 따르기만 해도 되는 것을 구태여 온갖 불필요한 것들로 대신하는게 과연 올바른 숭배일까요? 부활절이란 성서에도 없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교행위인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죠. 예수의 생일도 기록되지 않아 고대 태양신을 섬기던 날로 예수 생일이라 만들어 행하고 있는 것도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자중해야 할 일입니다. 원래 하느님 백성은 생일을 지내지 않았습니다. 성서에도 생일 때 살해사건이 두 번 나오는데 그 왕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부처는 생일이 기록돼 그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예수의 생일을 경축하기을 원했다면 성서에 그날이 기록되어 있었겠지요. 성탄절을 만들어 지키는 일은 하느님을 모르는 불교와 뭐가 다르겠어요. 성서에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들만 알려준다고 봐야죠. 보내주신 카톡 고마웠어요. 성서와 하느님에 관한 토론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이 도전하고 있는 문제는 첫째, 부활절 달걀 사용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부활절기와 성탄절기 같은 것을 왜 만들어서 지키느냐 이다. 모두다 이교도들이 하던 일이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나는 이분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는지 모르겠다. 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았으면 좋겠다.

 

부활절에 달걀을 사용하게 된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산으로 올라가실 때 잠시 십자가를 대신 져준 구레네 시몬의 직업이 달걀장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뒤 그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암탉들이 낳은 달걀이 모두 무지갯빛으로 변해 있었기에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꼭 이런 전설때문에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는 것은 아니다. 모든 나라가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지도 않는다.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가 부활절에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는 데는 구한말에 있었던 독특한 경험 때문이다.

 

구한말 가장 흔한 병이었던 학질(말라리아)에 특효약인 키니네(quinine·한자로 금계랍·金鷄蠟)를 당시 무역상사가 수입을 했고 이를 다시 전도사들이 사들인 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방에 되팔기도 했다. 약을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닭이 그려진 약병과 복음서를 함께 샀기 때문에 복음서나 예수교를 생각하면 닭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금계랍을 먹고 병이 나으면 복음서를 읽게 되니 닭은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한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그 닭이 가져다 준 달걀이야말로 하나의 큰 선물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가난하던 시절, 달걀 하나만 먹어도 영양이 보충되던 때에 달걀이 가져다준 의미는 매우 컸다. 옛날 옛적 어린 시절, 달걀은 그 자체가 부()의 상징이었다.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라도 들어있으면 행복했다. (소풍 갈 때 빼놓지 않은 메뉴가 삶은 달걀이었다.)

 

복음은 언제나 이렇게 그 지역의 문화를 그릇 삼아서 전파된다. 이것을 복음과 문화(기독교와 문화, 또는 토착화 신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성례전신학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공식적인 성례전은 두 가지 (가톨릭은 7가지)인데, 그것이 세례와 성만찬이다.

 

성례전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은혜의 경험을 말한다.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에게 경험이란 아주 절대적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 즉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져보거나 하지 않은 것을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오해한다. 가장 오해가 많은 기독교 용어가 믿음이다. 바로 이 말씀 때문에 그렇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굉장한 오해이고, 틀린 말이다. 기독교는 망상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경험의 종교이다. 왜 그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성육신 한 하나님이다. 성육신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헛되이 믿는 허망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보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이는 것을 믿느냐 못 믿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믿기 때문이다. 그것을 욕심 또는 욕망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어른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니, 벌거벗은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야 임금님에게 벌 받지 않으니까.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이는 어린아이다. 그래서 성경은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 복된 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부활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 허망한 것이 아니다. 예수를 통해 눈에 보이게 끔 드러난, 하나님의 생명을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인류는)는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신, 2천년 전 유대 땅에서 태어나시고, 갈릴리에서 활동 하시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한 사람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했다.

 

성경에 ‘yadah(야다)’라는 단어가 있다. ‘안다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인데, 이 말은 경험하다’, ‘성관계를 맺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통달하다는 뜻과도 같다. 누가 나를 가장 잘 알까? 부모님과 남편(아내)이다. 부모님은 나를 통달하고 있다. 나를 낳으셨기 때문이다. 남편(아내)는 나를 통달하고 있다. 서로 알몸을 드러내놓고 서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메타포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부부관계(결혼관계)로 표현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경험한다, 통달한다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간다. 부모님은 우리를 통달하기만 하셨는가? 부부끼리는 경험만 하는가? 아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부부끼리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은 통달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경험하고, 그리고 그 경험한 것을 사랑할 때 비로소 그 상대를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나느냐?” 사도 바울은 말한다. “예수의 부활이 전파되었다.” ‘전파되었다는 것은 15절 전반부에서 말하고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셨다는 뜻이다. , 제자들과 몇몇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했다.

 

부활의 증언을 듣는 우리들도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들도 부활한 예수의 몸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는 위에서 어느 누가 제게 카톡으로 문제제기를 했듯이 이교도의 풍습을 지키는 우상숭배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끔,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 경험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그것을 눈으로, 모든 감각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한 마음에 있는 것이다.

 

야로밀의 질문이라는 글이 있다.

야로밀이 물었다.

"네 안에는 어떤 세계가 있니?"

.

.......

.

"내 안의 세계?"

.

나에게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묻는 사람은 있었어도 내 안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

야로밀이 말했다.

"너는 불쌍한 아이로구나."

.

한 번도 나는 나를 불쌍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나는 내 안에 어떤 세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안에 있는 세계 대한 목마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

"네 바깥 세상은 네 안에 있는 세계에 비하면 누추하고 재미없단다. 네가 만약 네 안에 있는 세계를 발견하고 나면 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거란다. 네 안에 있는 세계 이외의 세계는 모두 신기루란다."

야로밀이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나면, , 하나님의 참 생명을 경험하고 나면, 이 세상의 일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 거다. 여기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있다. 눈으로 보여주는 데도 믿지 못하는 믿음 없는 자들이 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눈에 보이게 끔 해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참 생명을 경험해 보시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라. 그러면, 여러분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정말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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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