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34

믿음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5:1-8)

 

성경에서 개념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란 구원에서 필수 요소이다. 의는 신체의 피와 같다. 피를 다 흘리면 죽는 것과 같이, 의가 없으면 죽는다. ‘저 사람은 피가 달라할 때 쓰는 것처럼, ‘란 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성경에서의 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다. ‘신적인 의를 말한다. 문제는, 를 어떻게 감지하고,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삼느냐이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다. 피를 몸 속에 유지하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인 것과 같다.

 

로마서에서는 의가 세 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통해서, 둘째는, 율법에서,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로마서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58절에 드러나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선, 죄인이라는 개념을 보자. 죄는 매우 신학적인 개념이다. 죄는 매우 아슬아슬한 개념이다. 죄는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관련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런 거다

 

아버지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죄인가 아닌가?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것은 죄인가 아닌가?

 

통상적인 개념에서는 이 모두 죄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일을 말하고 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는 아브라함이다. 시아버지와 동침한 이는 다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을 오히려, 의인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다말의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향해 그는 나보다 옳도다(의롭도다)”라고 말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아브라함과 다말의 이야기가 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의인의 이야기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모두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 죽여 놓고 하나님이 시킨거야!’, 그러거나, 간음을 해 놓고, ‘하나님이 시킨거야!’, 이러면 안 된다. 그래서, 죄라는 개념은 아슬아슬 한거다.

 

여기서 핵심은, ‘란 철저하게 신학적 용어라는 뜻이다. 죄는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상태에서의 죄는 참으로 비참하다. 우리의 생명을 파괴한다.

 

말씀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는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어둠 속에 내던져진 상태이다. 어떠한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한국의 전례 동화 중에, <해와 달>이라는 전례 동화가 있다. 엄마가 시장에 가서 아이들을 주려고 떡을 사오는데, 그만 산길을 걷는 중 해가 지고 말았다. 얼마나 불안한가. 죄의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컴컴한 밤에 산 길을 헤매는 것과 같다. 밤 중에 산길을 걷는 엄마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호랑이가 나타나서 엄마를 위협한다. 호랑이가 아주 유명한 말을 하면서 엄마를 괴롭힌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들이 난무한 가운데, 그 거짓말에 의해 인생이 망치게 된다. 호랑이는 진실인 것처럼 꾸며서 계속 엄마에게 떡을 요구한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엄마는 호랑이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고, 그 말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얼마나 가련한가? 호랑이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호랑이의 요구를 들어준다.

 

그런데, 어떠한가? 호랑이가 떡을 자신에게 건네준 엄마를 살려주는가? 결국, 엄마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는다. 죄란 이런 것이다. 죄 가운데 있으면, 거기에서 어떠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속임수에 넘어가 그곳을 떠돌다, 결국 죄 속에서 죽게 된다. 죄의 끝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의 위협, 호랑이의 위협은 계속된다.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과 딸은 어둠 속에서 가슴 조리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엄마가 왔다. 아이들은 엄마가 떡을 사오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그런데, 도착한 것은 호랑이였다. 그들도, 어둠 속에서 호랑이에게 꼼짝 없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동화줄을 내려주세요~’ 그랬더니, 정말로 하늘에서 동화줄이 내려왔다. 호랑이도 기도했다. ‘하나님, 동화줄을 내려주세요~’ 그랬더니, 정말로 하늘에서 동화줄이 내려왔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내려온 동화줄은 튼튼한 동화줄이었고, 호랑이에게 내린 줄은 썩은 동화줄이었다. 아이들은 튼튼한 동화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구원 받았고, 호랑이는 썩은 동화줄을 타고 올라가다 허공에서 그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

 

아이들에게 동화줄은 구원이지만, 호랑이에게 동화줄은 심판이었다. 왜 그런가? 아이들에게는 가 있고, 호랑이에게는 가 있기 때문이다.

 

의의 속성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우리가 캄캄한 밤 가운데에서, 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동화줄을 내려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 아이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동화줄을 내려 주실 거라고 믿었다. 의심하지 않았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신다. 믿음이란 바로 이 안에서 작동한다. 믿음은 그에 대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랑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아무리 기도해도 동화줄이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화줄이 내려오기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사랑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절대로 될 수 없다. 호랑이처럼, 동화줄을 타고 올라가 아이들을 잡아 먹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동화줄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음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듣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여러분의 욕망을 믿음이라는 것에 덧입혀 낭비하지 말라. 호랑이의 마음을 버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가지라.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그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바로 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참으로 의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셨는가? 그 사랑 안에 거하시겠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 있는 자이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원할 것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의 사람  (1) 2016.05.16
우리는 누구의 양인가  (1) 2016.04.21
교회의 터 (바울의 교회론)  (0) 2016.04.11
부활이란 무엇인가  (1) 2016.04.11
눈감고 눈뜨기  (0) 2016.04.11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