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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7. 5. 8. 14:59

나와 당신 (I-Thou)

(눅 10:25-36)

 

비와 벌

 

처마 밑을 맴돌던 벌 한 마리가

주저 앉다 말고 갑자기

빗속으로 뛰어 들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곤충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른다

 

다만 빗속에서 비 맞고 돌아다녔다고

나처럼 그 벌도 엄마한테 혼날까봐

그것이 걱정된다

 

빗속으로 뛰어드는 벌을 보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나도 앞뒤 가리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비를 흠-뻑 맞고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혼나고 싶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고, 스승의 날도 있다. (물론 미국에는 어린이 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어린이에 대한 인권이 충분히 확보되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어린이 날이 생긴 계기는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한 것이었고, 또한 3.1운동을 시작으로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

 

국제적으로 어린이의 인권 보호 운동은 1925년 제네바에서 있었던 아동 복지를 위한 세계 회의(World Conference for the Well-being of Children)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각 나라에서는 어린이날을 지정하여 지키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나라가 어린이날을 지정하여 지키고 있지는 않다. 그 중에서 특이한 것은 한,,일 세 나라에 어린이날이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세 나라는 문화적 영향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의 어린이날도 실제로 소파 방정환을 비롯한 일본의 유학생들 중심으로 제정되었다. 이들은 1923 5 1, 색동회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어린이 운동을 펼쳤다.

 

동양문화권에서 어린이의 인권이 이슈가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 말에서도 어린이라는 낱말이 등장한 것도, 소파 방정환 선생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젊은 사람을 젊은이라고 하듯이 나이가 어린 사람도 어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린이'라는 용어를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다.

 

어린이날이 아동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제정된 것과는 달리,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은 인권 향상의 의미보다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제정된 날이다. 19565 8, 원래는 어머니 날만 시행되었다. 그러다, 아버지들의 반란 때문에 1973년부터 어머니와 아버지의 날이라는 뜻으로 어버이날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날 제정이 일본의 영향이라면, 어버이날 제정은 미국의 영향이다. 게다가, 어버이날이 되면 부모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풍습도 미국에서 온 것이다. 100여 년 전, 어느 한 소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어느 모임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그러한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카네이션의 꽃말은 건강을 비는 사랑이라고 한다.

 

스승의 날은 상당히 자생적인 기념일이다. 그리고, 그 날짜 지정도 굉장히 특이하다. 처음에는 국제연합 가입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했다가, 1965년부터 세종대왕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 지키고 있는 5 15일은 스승의 날이지만, 세종대왕 탄신일이기도 하다.

 

지금 시대를 보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인권이 없어 특별히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인권을 외쳐야 했던 어린이는, 현재 처럼 대우 받는다. 그러나, 인권의 최상위에 있었던 부모님과 스승님의 인권은 날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어린이날을 없애고,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의 취지를 바꾸어야 할 판이다.

 

우리는 관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관계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부부의 관계, 그리고 나와 이웃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모든 것이 위태롭다. 어린이날, 부모가 자식을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어버이날, 자식이 부모를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스승의 날, 제자가 스승을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신앙인으로서, 주일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어느 날,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을 다른 말로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이런 것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교사와 예수님 간의 대화에 의하면, 구원을 얻는 길은 이렇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10:27, 19:18, 6:5).

 

이 말씀에 의하면, 구원의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구원은 사랑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우리가 얼마나 구원에 가까이 살고 있는지, 아니면 구원에서 멀리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율법교사는 더 나아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 주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집으로 가려고 여리고 쪽으로 내려 가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발가벗겨진 채로(그 당시에는 옷도 귀해서 옷도 빼앗아 갔다) 거반 죽은 상태가 되어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그때 마침, 세 종류의 사람이 그곳을 지나친다.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거반 죽게 되어 길가에 버려져 있는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친다. 결국, 강도 만난 자를 구해 준 것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별다른 설명이 없는 것을 보니, 강도 만난 자는 유대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 만난 자를 구해주어야 마땅한가? 같은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 제사장 또는 유대인인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구해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형제,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그들이 평소에 원수로 생각하고 사람취급 안 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해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처럼,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관계의 위태로움을 목격하게 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 것과 같다. 자신이 제사장이고 레위인이고, 특별히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이고, 유대인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관계를 물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해 주었을 것이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관계를 질문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자각했던 사람이다.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바라보았을 때,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겼. 이 능력(상대방을 인식하는 능력)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능력이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존감을 상실했다는 데서 온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 일본의 소설가 나스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난 죽기 전에 단 한사람이라도 좋으니까 남을 믿어보고 죽고 싶어요. 학생은 그 단 한 사람이 돼 줄 수 있겠습니까?” 자존감의 상실은 나도 못 믿고, 남도 못 믿는 비극을 불러 온다.

 

자존감을 상실하는 이유는 마땅히 받아야할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마땅히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자식은 마땅히 부모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사회에서는 이게 잘 안 된다. 부모는 자기 자신을 높여주는 자식만 사랑한다. 엄마의 학대(공부학대)에 참다참다 못참아 엄마를 죽이고 감옥에 간 한 학생의 글이다. “부모는 멀리 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하고 학부모는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부모인가, 아니면 학부모인가?

 

자식은 마땅히 부모님을 사랑해야 한다. 부모는 마땅히 자식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자식은 부모가 경제력이 없으면, 부모 취급도 안 하고, 그마저 부모가 늙으면 갖다 버린다. 얼마 전, 신문에서 버림 당하는 치매노인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기사는 이것을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명명했다.

 

요즘 사회를 능력 사회라고 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사람 취급 받는 사회라는 뜻이다. 능력 있는 자식이 사람 취급 받고, 능력 있는 부모가 사람 취급 받고, 능력 있는 스승이 사람 취급 받고, 능력 있는 남편, 아내가 사람 취급 받는다. 능력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예일대학교의 생화학자인 헤롤드 J. 모로위츠는 인체의 화학물질을 계산해 보면, 인간생명은 600만달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헤모글로빈은 그램당 285달러, 인슐린은 그램당 47달러, 효소 트립신은 36달러, 탑즙색소 빌리루빈은 12달러, DNA 76달러, 콜라겐은 15달러, 알부민은 3달러, 덜 알려진 물질로 효소를 활성화시키는 아세테이트 키나아제는 그램당 8,860달러, 알칼리 포스파타테는 225달러, 이할루론산 교착물질은 175달러, 브래디키닌아미노산 12,000달러, 젖샘의 젖 생산을 자극하는 호르몬 프로클랙틴은 그램당 175만달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체중 1그램의 가치는 평균 245달러라는 결론을 내린다. 모로위츠 박사는 자신의 체중이 168파운드인데 68%인 물을 빼고 계산하면 24,436그램으로 24,436×245달러는 6,000,015.44달러가 된다는 것이다.

 

안구 하나 구입하려면 1억 이다. 눈 두개를 갈아 끼우려면 2억이 들고, 신장 바꾸는 데는 3천만원, 심장 바꾸는 데는 5억원, 간 이식 하는 데는 7천만원, 팔다리가 없어 의수와 의족을 끼워 넣으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다. 지금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몸에 약 51억이 넘는 재산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을 물로 보면, 인간은 5리터의 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값어치는 3달러 정도 밖에 안된다. 사람을 물로 보면 안 된다.

 

나와 당신(I-Thou)’는 유대인 철학자(신학자) 마틴 부버의 용어이다. 그는 인간 간의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나와 그것(I-it)’의 관계로 가지면, 그저 육체적인(physical)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러 착취의 관계 머물게 되지만, 그것을 나와 당신(I-Thou)’의 관계로 발전시키면 영적인 관계에 도달해, 상대방을 착취의 관계가 아닌 사랑(교제, 친교)의 관계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그저 나와 그것의 관계로 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와의 관계를 나와 당신의 관계로 발전시켜 영적인 관계, 사랑의 관계로 그를 바라보게 되어, 그를 바라볼 때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러한 관계가 구원을 가져 온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한 것이지, 우리가 능력 있는 존재라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관계가 위태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관계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올바로 맺는 길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