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6. 07:21

예배 - 주께 돌아옴

룻기 1

(룻기 1:1-14) 


5월 한 달 동안 진행되었던 세화하늘축제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우리 모두가 경험했다. 나경화 선교사 초청 집회, ‘지금은 세화시대를 외치며 출전했던 북가주 지역 교회간 친선 탁구대회 (응원상), 브라이언 킴 초청 집회, 그리고 장윤식 목사 초청 부흥성회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보았고, 세화의 미래를 보았다.

 

특별히 부흥성회에 큰 은혜가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부흥회 시작하는 날, 핸드폰과 지갑을 분실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방해도 있는 법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내가 초보 목사였으면, 핸드폰과 지갑을 분실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부흥회를 그르쳤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부흥회에만 집중했다.

 

이 세상에는 빛도 있지만, 어둠도 있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자꾸 까먹는다. 도시의 불빛은 이 세상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도시의 불빛에 너무 취해 있으면 안 된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방해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멀쩡히 주님 앞에 나와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연어와 같다. 세상과 같은 망망대해로 나갔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 연어의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강 상류이지만, 우리의 고향은 그리스도의 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돌아온다.

 

연어가 강 상류로 돌아가 그곳에서 알을 낳고 죽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다. 돌아가는 일은 모험이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연어가 위험을 떠안고 모험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삶의 이유이고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이유이고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이것을 깨달은 상태이다.


이것에 대해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찬미함으로써 향유하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합니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합니다라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쉴 때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는 우리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즐비하다. 이런 노래가 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잔치에 갈 수 없어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도 많아 내 어이 하리 죄송해요 한 어느 마을에 멋진 집에 살던 사람이 큰 잔치를 벌여놓고 손님 청했네 그가 널리 이웃더러 오라 했더니 그때 모든 사람들이 대답하는 말~”(14)

 

우리는 오늘 나오미의 삶의 여정을 본다. 룻기 1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사시들이 치리하던 때가 어떤 때인지, 우리는 사사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살아가기 쉽지 않은 시대였다. 무질서하고 혼탁한 시대, 삶의 터전이 매우 빈약한 때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국가로서의 어떠한 문화와 정치적 체계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때였다. 그때,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그때에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다.”

 

베들레헴은 집을 의미하는 베트와 떡을 의미하는 레헴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다. ‘떡집이라는 뜻이다. 떡을 굽는 마을로서 베들레헴은 양식의 집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양식의 집을 떠나 모압 땅으로 거류하러 갔다. 거류한다는 히브리어의 구르라는 말인데, 이는 이방인, , 난민으로서 눌러 앉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2절에는 한 사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었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였고,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었다. ‘엘리멜렉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이고, ‘나오미는 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이들의 신앙과 삶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던 엘리멜렉 가정에는 기쁨이 넘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의 삶에 시련이 닥친다. 우리는 그것을 그의 아들들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 엄마의 이름과는 달리, 두 아들이 이름 말론과 기룐은 그렇게 좋은 이름이 아니다. 말론의 뜻은 병약한 자이고, 기룐은 폐결핵, 또는 멸망이라는 뜻이다.

 

이 두 아들의 이름에서 풍기는 불길한 기운이 모압 땅에서 현실화 된다. 푸른 꿈을 안고 어렵게 결심한 이주인데, 모압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는다. 그리고 나오미의 두 아들은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 첫째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인데, 그 뜻은 목덜미라는 뜻이고, 둘째 며느리의 이름은 인데, ‘원기회복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10년 후에 두 아들도 마저 죽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오미는 모압 거류민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오늘 말씀에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6).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다. 돌봄과 양식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양식의 집베들레헴을 떠난 이유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거류민이 되었다. 그런데, 양식을 구하러 간 곳에서 양식을 구하지 못하고, 그들이 얻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오미는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되돌아 오려고 하고 있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1절의 라구르(거류하기 위해)7절의 라슈브(돌아오려고)가 대비되고 있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 떠났던 나오미가,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실제로 이민생활(거류민)을 하고 있는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아주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거류민으로 이곳에 살면서, 양식을 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거류민으로 살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그래서 한인이민자들은 교회를 다니는 비중이 매우 높다.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단순히 신앙의 장소가 아니라, 쉼과 우정과 회복의 장소이다. (이민자들의 교회는 종교집회 장소의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물리적인(physical) 마음의 고향이다. 고향의 언어와 문화와 사람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이민교회는 매우 중요하다.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거룩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주께 돌아와 있기 때문이다. 피터 셰퍼의 연극 에쿠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예배하지 않으면 움츠러들게 될거야. 그만큼 잔인한 일은 없지.” 여러분은 어떤 음성을 듣고 이 자리에 돌아와 있는가? 나오미가 들었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도 날마다 들리시길 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예배는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경험하는 것이고,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반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를 쓰고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놓여 있더라도, 이겨내고 기를 쓰고 돌아오라. 그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굴복하지 말라.

 

왜냐하면, 양식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생명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예배는 그러한 신앙고백이 담긴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거기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이다.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양식이 있습니다. 주님께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돌아옵니다.”

 

록펠러의 십일조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성실한 신앙인이 된 데에는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아들 록펠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너는 예배 30분전에 도착하여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가장 정성껏 예배를 드려라.”

 

나는 지금 록펠러 이야기를 하면서 예배 잘 드리면 록펠러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를 사랑하는 자, , 주님께 돌아올 줄 아는 자는 주님께서 돌보시고 그에게 양식(생명)을 주신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복음이 여러분의 귀에 들렸으면 좋겠다. 우리 서로 귀에 들리게 이렇게 말해보자. “예배 잘 드립시다! 주님께로 돌아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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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