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6. 07:24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마가복음 15:33-41


십자가 상에서의 칠언 (가상칠언)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들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23:34)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 19:26-27)

4)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27:46, 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5) 내가 목 마르다 ( 19:28)

6) 다 이루었다 ( 19:30)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23:46)

 

마가복음에는 십자가 상의 칠언 중, 4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만 나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외치고 죽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시편 22편에서 왔다. 극한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그만큼 말씀이 내면화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에 걸쳐 이루어 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얼마큼 말씀이 육신이 되는 내면화 과정에 들어서 있는가? 희로애락의 상황에서,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무엇인가? 세상적인 신음과 욕설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시편 22편의 1, 2절은 이렇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옛날에 짚신 장사를 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짚신은 잘 팔리는데, 아들 짚신은 잘 팔리지 않았다. 아들은 자기가 만든 짚신이 왜 잘 팔리지 않는지, 잘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됐다. 아들은 죽어가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울며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 짚신은 잘 팔리는데, 내 짚신은 왜 잘 안 팔려요? 아버지 짚신과 내 짚신의 차이는 뭐에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이라고 한 마디만 남겼다. 아들은 아버지를 고이 묻어 드린 뒤, 아버지가 남기신 한 마디 이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아버지 짚신과 자기 짚신의 차이점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흐린 뒤, 아들은 아버지가 남기신 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바로, 아버지의 짚신은 털 한 가락 나오지 않은 부드러운 짚신이었고, 아들의 짚신은 털이 삐쭉빼쭉 튀어 나왔던 것이다. 그 이후, 아들을 아버지가 만든 짚신처럼 털 한 가락 나오지 않은 부드러운 짚신을 만들어 내다 팔아, 잘 먹고 잘 살았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이 시편 22편의 첫 번째 구절만 외치신 것은 시편 22편의 말씀 전체를 하나님 앞에 아뢴 것과 똑같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시편 22편의 말씀 전체를 외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한 구절, 또는 한 단어만 외쳐도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담기는 법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어가면서 짚신 잘 만드는 법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라마 라마 사막다니를 외치신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것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시편 22편은 원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건지실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여호여와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19-21).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송의 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라마 라마 사막다니를 외치신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자기를 버리신 듯한 하나님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은 믿음과 찬송의 외침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응답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닌 구원의 죽음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나타내 보이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를 본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 놓여 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간다. 그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구원사라고 한다. 그냥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 놓여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한마디로,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른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구원자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이루신 그분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름 부음 받은 자인데,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단순히 구원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의 깊은 차원을 만난다. 구원이라는 말이 세속적으로 바뀌면 번영이라는 말이 된다. 사람들은 번영하기 위하여 아우성 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자체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다른 말로, ‘순종이라고 한다. 구원은 순종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신적인 은혜이다.

 

스펄전 목사는 타 도시에서 자기가 돌보는 런던의 고아들을 위해 300 파운드를 모금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그 돈을 조지 뮬러 목사에게 갖다 주라는 음성을 들었다. “! 주님, 저희 고아들도 이 돈이 필요한데요그러나 그 음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그 돈을 들고 뮬러에게 갔다. 뮬러는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지, 하나님께서 내가 모금한 300파운드를 당신에게 주라고 해서 가져 왔소.” “스펄전 목사님, 저는 지금 바로 300파운드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뻐했다. 스펄전 목사가 사무실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와 있었는데 300기니의 헌금이 들어있었다. “주여, 300파운드에 이자까지 보태서 주시는군요!” 그는 감격하여 감사를 드렸다.

 

이것은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언 19:1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순종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그것에서 구원의 은혜가 나왔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면,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가 넘쳐나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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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