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 15:27

고통의 언어

(예레미야 애가 5:1-22)


예레미야 애가는 에카로 시작한다. ‘에카슬프다는 뜻이다. 우리의 몸(피부)에는 보통 통증을 전달하는 세포와 신경전달물질이 있다. 이 체계가 망가지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통증은 사람에게 아픔또는 고통을 전달한다. 아픔, 또는 고통을 받으면 사람은 거기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신발이 변변치 않았다. 밑창이 얇은 운동화이거나 학교에서 신는 실내화 같은 게 많았다. 그리고 문제는 비포장 도로가 많다 보니 길 위에 놓여 있는 못 같은 거를 밟으면 그것이 운동화를 뚫고 들어와 발바닥에 박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때는 파상풍 주사같은 것도 발달되어 있던 시대도 아니라서 발바닥에 못이 박히면 상처를 불로 지지며 망치로 때리거나, 거기에 된장을 바르곤 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고통에 반응하는 것이다. 만약, 못이 발바닥에 박혔는 데도 그것에 대한 고통을 못 느낀다면, 그 사람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삼국지에서 명의 화타가 관우의 팔을 수술할 때 눈 하나 깜짝 안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관우의 용맹함에 대한 표현이지 관우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고통을 못 느끼니까 못이 박힌 발을 그냥 내버려둘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파상풍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물론, 고통의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파상풍 때문에 자신이 죽어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대부분 육신에서 오는 고통에 대하여 대처하는 법을 배워서 알고 있다. 육신의 고통이 오면 어떻게 하는가? 병원에 간다. 병원에 가면, 의사를 만나게 되고, 의사를 만나면 자신이 겪고 있는 육체의 통증에 대해서 진술한다. 그러면 의사는 그것을 토대로 이런저런 검사를 한다. 그리고 문제를 발견해서 그것을 치료한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렇게 당연한 일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자신의 통증을 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인지를 하더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전 뉴스에 보니, 중국의 한 시골에 살던 한 할머니의 뱃속에서 죽은 태아가 나온 사건이 있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 할머니는 자신의 뱃속에서 죽은 태아를 꺼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배가 나온 채로 그렇게 살았다. (고통에 대한 대처법도 학습되는 것이다. 우리 큰 아들도 어릴 때 눈이 나빠서 잘 안 보였는데, 눈이 잘 안 보이는 고통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아이는 그것이 자기가 대면하는 세상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인줄로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이가 눈이 나쁘다는 것을 발견하고 안경을 씌워줬는데, 참 안쓰러웠다.)

 

그리고, 통증을 인지했더라도, 그 통증을 치료할 곳이 없다면, 그것은 또다른 비극을 낫는다. 통증을 치료해줄 의사나 병원시설이 없는 것도 문제이고, 의사나 병원시설이 있더라도 거기에 접근할 수 없는 시스템도 문제다. 일례로, 미국의 의료시스템에 비판이 가해지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의사와 병원시설이 있으면 뭐하는가? 돈이 없으면, 의료보험이 없으면 그림의 떡인데. (실제로 이민자들이 겪는 고통 중의 하나이다. 웬만큼 좋은 보험이 아니면, Deductible이 너무 많아서, 섣부르게 병원에 갈 수 없다. 특별히 응급실 가는 행위는 재앙이다. 나도 갑자기 요로결석이 와서 응급실에 갔었는데, 모르핀 주사 한 방 맞고, 의사 한 번 보고, 2시간 정도 있다 통증이 가라앉아서 나왔는데, 병원에서 날아온 청구서에는 8천불이 찍혀 있었다. 그거 해결하느라 엄청 애 먹었다. 그래서, 이민자들에게 다른 게 죄가 아니라 아픈 게 죄다. 이민자 뿐만 아니라, 치과보험에 들지 못한 미국 사람들이 치아 치료를 제 때 하지 못해서 죽는 사망자 수가 어마어마하다.)

 

육신의 병 때문에 오는 통증에 빠르게 대처해서 그 통증을 치료하여 몸을 보호하는 일도 이렇게 힘든데, 우리의 영혼(soul)에 오는 통증에 대해서 대처하고 치료하는 일은 얼마나 힘들까. 우리는 비교적 육신에 통증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데 반해, 영혼에 고통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왜 저래?” (physically)은 건강해 보이는데,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 어디 아픈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실제로, 사고는 몸 아픈 사람이 치는 게 아니라 영혼 아픈 사람이 친다. 흉악범들의 신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멀쩡하게 생겼다. 그런데, 왜 그렇게 흉악범이 되었는가. 자신의 아픈 영혼을 어쩔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영혼에 고통이 다가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가? 이 찬양이 저절로 나오는가?

 

감사해 시험이 닥쳐 올 때에 주께서 인도 하시니 두려움 없네

또 감사해 고통이 찾아 올 때에 주께서 지켜 주시니 승리하리라

나의 모든 생활 속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니

주님의 성령 나를 인도하시리

시험이 나를 찾아올 때 주님이 지켜 주시리

주님의 성령 나를 인도하시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못 배운다. 이것이 내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의 언어를 배우기도 전에, 감사의 언어부터 배운다. 그야말로, 치료는 안 하고, 아편을 맞는 꼴이다. 시험이 닥쳐오고, 고통이 찾아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감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쳐온 시험과 고통을 놓아두고 감사하기 이전에, 탄식해야 한다.

 

나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가치들 중 가장 중요한 가치는 우리에게 고통의 언어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 이외에 고통의 언어를 가르쳐 주는 곳을 알지 못한다. 이 세상에 고통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들은 성공의 언어이지 고통의 언어가 아니다. 가는 곳곳마다 모두 성공의 언어만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각 시대마다 하이틴 스타가 있지만, 우리 시대 하이틴 스타는 단연 이미연이다.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이미연은 그 당시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불후의 명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찍는다. 그 영화에서 이미연은 전교 1등 여학생으로 등장한다. 거기에 그 여학생을 짝사랑하여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남학생 역할을 한 배우가 최근 의리로 유명해진 김보성(허석)이다. 그 영화에서 이미연은 전교 1등으로서 성공의 언어는 배웠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에 불어 닥친 아픔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그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주제는 영혼의 아픔이 아니다. 입시 때문에 고달픈 청소년들의 아픔을 고발하는 영화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의 언어만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고통의 언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자기의 고통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여 치료 받지도 못한다.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냥 고통 가운데 죽는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남의 고통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을 알아봐주고 적절하게 대응해 주지도 못한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내 인생의 비극만 아니라 관계의 비극도 경험하게 된다.

 

(인지부조화이론)

 

우리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무엇인가? (생물 문제: 우리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1) 한포 2) 두포 3) 세포 4) 네포 5) 대포 (문제를 바꾸어서, 김정은의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무엇인가? : 대포) 세포이다. 의학적 발견에 의하면, 우리가 암에 걸리는 이유는 저산소와 저체온 때문이란다.

 

세포 내에는 Glycolytic system(해당계)와 미토콘트리아계, 두 개의 에너지를 만드는 시스템이 있다. 해당계는 당을 이용해서 에너지를 만드는데, 그 과정에서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토콘트리아계에서는 에너지를 만들 때 산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해당계는 세포분열을 촉친하고, 미토콘트리아계는 세포분열을 억제한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하고 바쁘게 움직일 때, 그리고 욱하고 화가 날 때, 저산소와 저체온의 상태가 되는데, 이는 해당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때 젖산(유산)이라는 것이 분비된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하고 바쁘게 움직이고 화가나면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해당계가 발달하고, 미토콘트리아계가 비활성화되어 우리의 몸은 저산소와 저체온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 바로 그때 암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암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저산소와 저체온이라고 하는 것이다. 암을 예방하고, 암을 치료하려면 유산소운동과 몸을 따뜻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의학계에서는 유산소 운동을 많이 하고,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암에 걸리는 이유도 똑같다. 저산소, 저체온 때문이다. 영혼이 아프면, 숨쉬기 곤란해지고, 알 수 없는 추위를 느낀다. 영혼의 저산소와 저체온증을 극복하는 방법은 고통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당뇨병 환자의 가장 큰 위험은 통증(고통)을 못 느껴, 돌연사하는 것이다. 한센병 환자의 가장 큰 위험은 통증을 못 느껴 반응하지 못해 죽는 것이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어느 순간 영혼이 돌연사한다. 마음이 강퍅해지고, 마음이 강퍅해져 있기에 외부 세계의 어떠한 고통도 동감(sympathy)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죽고, 외부의 세계도 죽인다.

 

우리가 이처럼 예레미야애가나 시편 같은 성경을 열심히 들여다 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 영혼에 닥쳐온 고통을 올바로 치유하기 위해서이다. 고통의 언어를 배워 내 안에 닥쳐온 고통을 하나님을 향해 올바로 탄식할 때, 그리고 반드시 탄식의 과정을 거쳐야, 그 지난한 과정의 열매로 오는 은혜가 감사인 것이다. 감사는 고통의 언어가 맺는 열매, 또는 지향하는 목적이지, 고통의 언어로 가득 찬 탄식의 과정 없이 우리에게 오는 매직(마술)이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고통의 언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먹고 살려고 성공의 언어는 반드시 배우면서, 왜 나의 존재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살려내는 고통의 언어는 배우지 않는가. 성공의 언어가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라, 고통의 언어가 우리를 살린다. (나는 주로 고통의 언어를 새벽시간에 설교하고 가르친다. 오직 성경에서만 가르쳐 주는 고통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면, 새벽예배를 나오라.) 고통의 언어를 잘 배워,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