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 15:21

열심히 하면 죽는다

(요한복음 2:13-22)

 

본문은 소위 성전청결사건이라 불린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성질을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도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 성질을 부렸다며, 자신의 성질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우스운 일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성전은 헤롯성전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심장이었는데, 헤롯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성전이다.

 

헤롯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이유는 신앙 때문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는 복잡한 이력(이두매 사람)을 지닌 통치자였기 때문에 유대 땅의 통치자로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소망하는 것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그의 통치권을 인정 받으려 했던 것이다.

 

헤롯성전은 솔로몬 성전이나 초라했던 스룹바벨 성전에 비하면 그 규모가 엄청났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 주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제사장들과 산헤드린공의회 회원들의 집권을 강화시켜 주었는데, 성전으로 순례를 오는 사람들을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을 거둘 수 있었다. (한국의 불교가 굳건히 서 있는 이유,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이권 다툼이 잦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거두는 문화제통행료 수입 때문이다.)

 

헤롯성전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직분이나 성별, 그리고 민족(유대인, 이방인)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 구분되어 있었다.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는 매매는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진 상업적인 매매는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성전을 운영하는 유대당국의 이익에도 맞았고, 먼 곳에서 성전으로 순례를 왔던 순례자들의 편의에도 맞았다.

 

먼 곳에서 순례를 오는 사람들이 제사에 바칠 동물을 함께 데리고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전세를 내야 했는데, 이국에서 온 이들이 그곳에서 환전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외국에 갔을 때, 공항에서 빠져 나가기 전 그 나라의 돈으로 환전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한 마디로, 이방인의 뜰에서의 매매는 합법적이고 상식적인 일이었다.

 

유월절 때에 성전을 방문한 예수님은 그곳에서 장사치들을 내쫓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이에 해당하는 구약의 말씀은 없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이 추정하는 이 말씀에 해당하는 구약의 말씀은 스가랴서의 이 말씀이다.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니라”( 14:21). 여기서 가나안 사람은 상인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 성전청결사건이 가진 의미이다. 그 의미와 관련된 구절이 두 개 나온다. 하나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라는 구절인데, 성전청결사건을 보고 제자들이 시편 69 9절의 이 말씀을 되돌아 봤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구절인데, 제자들은 이 뜻의 의미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깨달았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다.

 

성전청결사건을 감행한 예수님의 행동은 옳다. 시편 69 9절의 말씀이 그를 뒷받침해준다. 시편의 이 말씀은 다윗의 탄식이다. 하나님의 향한 자신의 열심 때문에 자신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는 탄식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던 성경의 인물 중 대표적인 인물은 다윗 외에도 비느하스와 엘리야가 있다.

 

비느하스 이야기는 민수기 25장에 등장하는데, 그는 아론의 손자이고, 엘르아살의 아들로서, 바알브올에서 발생한 이스라엘 남자들의 우상숭배 사건을 해결하는 신실한 제사장으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모압 땅에 이르러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이에 염병이 돌아 많은 이들이 죽게 된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기 위하여 창을 들고 모압 여인과 음행하는 남자를 그 자리에서 죽인다. 그로 인해 염병은 멈추게 되는데, 이미 2 4천명이 죽은 후였다. 비느하스의 열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에서 모두 죽었을 지 모른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열왕기상 19장에 나온다. 특별히 19 10절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만국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이것은 엘리야가 바알선지자와 아세라선지자 850명과 대결한 후, 이세벨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여 낙심해서 호렙산에 머물 때에 하나님과의 대면을 기록한 구절이다. 엘리야의 열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열심이 이스라엘을 구했지만, 엘리야는 그 열심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하나님의성전)을 사모하는 예수님의 열심이 예수님을 삼키게 될 것이다’. ‘삼킨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위험하다. 죽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보듯이,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유대당국자들은 예수님이 행한 성전청결사건을 본 뒤, 예수님에게 와서 그렇게 행하는 표적이 무엇인지 묻는다. 유대당국자들은 이방인 뜰에서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매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를 예수님에게 물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에 대한 권위가 누구로부터 받은 것인지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46년째 지어지고 있는 성전을 헐면, 3일만에 다시 짓겠다는 게 무엇인가? 무슨 기적을 행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깨달았다고 본문은 전한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은 이런 뜻이다. “내 육체를 죽이라, 그러나 나는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육체가 죽어도, 그러한 자는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행하는 일에서 엄청난 고난과 고통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옳다고 인정해 주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이실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주의 일을 행하는 우리의 동력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믿음을 찾아보는 일이 쉽지 않은 세상이 됐다.)

 

열심히 하면 죽는다. 그래도 괜찮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에 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정말 주를 위해 열심히 한 것 때문에, 무엇인가 손해본 것(죽은 것, 가령, 재산손실, 명예훼손, 가족관계 또는 부부관계 소원)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 없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부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열심을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믿음, 이러한 열심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