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2. 4. 2. 04:05

2012 4 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11

제목: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은혜만 받는 사람은 영성이 뛰어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빌립보 교회에게 하나가 되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을 뜻합니다. 언뜻 보면 참으로 은혜롭고 당연한 말씀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참으로 낯선 세상입니다. 현실적으로 한 마음을 품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뿐더러, 도대체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질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첫째, 같은 사랑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둘째,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령이 하나가 되어 일치된 생각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넷째, 각자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곧 이기심을 채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도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위의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참으로 아득해 보이기만 합니다. 이 세상은 절대로 한 마음을 품도록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은 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잠시 같은 생각을 품을 때도 있긴 합니다. 그 때는 분명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될 때만 그렇습니다. 손해 본다 싶으면 절대로 같은 마음을 품거나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합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다른 꿈을 꿉니다. 게다가 이 세상은 절대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높이 올라가려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어떻게 해서든 주변 사람들을 밟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많이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자기 일이나 잘 하면 됐지 남의 일을 도와 주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도와줄 때는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때뿐입니다. 자기를 포장하기 위해서 남을 도와 줄 뿐이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몸에 베어 있는,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한 마음은 우리의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그토록 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나가 되라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신앙 실천의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의 삶을 맡긴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나의 운명을 건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어떠한 삶인가에 대한 선이해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비하-영화의 도식을 발견합니다. 그는 이 도식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발견되는 비하-영화의 도식이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이 곧 자기 비하인데, 이는 자기 비움, 종의 형체를 가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남을 뜻합니다. 여기서 비우는 것을 뜻하는 헬라어 케노오는 신적 신분 또는 신적인 존재방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단지 신적 권위를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비하의 마지막까지 가십니다. 바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심,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이해가 안 가는 부분입니다. 이 세상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비하시키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상승시키라고 가르칩니다. 올라갈 수 있는 끝까지 올라가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 영혼까지도 팔아 먹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법칙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자기 비하를 삶의 방식으로 취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비하의 끝인 십자가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세상은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고 허무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하는 구원을 위한 필수 요소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종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의 죽음을 보고 비웃은 세상에 대한 비웃음이었고, 그렇게 죽음으로 끝나버렸다는 허무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고 자기 자신을 비운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비하를 통해,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는 순종(복종)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명 냄새 나는 일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원리입니다.

 

이 세상은 높아지는 것을 통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한 높아져야만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축복의 근거요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온통 부흥, 성장’, 그리고 의 구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는 생명의 원리는 높아지는 것에 있지 않고, 자기를 비우는 것, 죽기까지 순종(복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하나가 되어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교회에 충만하게 될 거라고 가르칩니다.

 

하나가 되는 일은 자의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호를 외치고, 의지력을 기른다고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성경의 권면에 선뜻 아멘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마음은 세상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낮추어 십자가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든지 말든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품는 것이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이 세상의 원리와 다르고,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추는 것 같아 별로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을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겠다고 나선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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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