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2. 3. 13. 07:32

2012 3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3-22

제목: 누가 왕인가?

 

작년에 연말 드라마 시상식을 휩쓸었던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과 그것의 반포를 막으려는 세력 간의 갈등을 그린 명품 드라마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을 성군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세종대왕이 그렇게 성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 태종(이방원) 때문이라는 것이 한국 역사 학계의 정설입니다.

 

이방원(태종)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왕조로서의 명백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이 존립하는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고려 말기에 고려가 휘청거리는 이유 중 하나가 왕권이 무너지고 주변의 귀족 세력들이 득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위해 지독한 정치를 펼칩니다. 왕권에 위협된다고 생각했던 세력들을 모두 처단했고, 그 중에서도 조선 개국 공신 중 최고의 공신인 정도전을 제거합니다. 그야말로 정도전을 토사구팽시킨 것이지요.

 

정도전은 이방원의 생각과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입니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원했던 반면에, 정도전은 왕권은 최소화하고 유림들(선비들)이 실질적인 권한을 지닌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의 서슬 퍼런 칼날이 정도전을 향했고, 정도전은 일등개국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작년에 안방 극장을 휩쓸었던 또 다른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 “공주의 남자라는 사극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보다 조금 일찍 다른 방송국에서 방영됐던 드라마입니다. “공주의 남자는 세종대왕 이후 문종과 단종, 그리고 세조에 걸친 역사를 바탕으로 구성된 드라마였습니다. 세종대왕 이후에 이방원이 세워놓은 강력한 왕권은 문종과 단종을 거치면서 무너집니다. 문종은 너무 건강이 안 좋았고, 단종은 너무 어렸습니다. 그 틈새를 타고 중신들이 득세를 했지요.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서입니다.

 

왕권이 중신들에게 밀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 바로 수양대군(세조)입니다. 수양대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정이 할아버지 이방원과 닮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력한 왕권을 다시 정립하고자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 할아버지 이방원이 그랬듯이 피 비린내 나는 숙적제거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이 그 유명한 한명회입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던 사극 드라마가 그 유명한 여인천하입니다.

 

우리는 지금 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왕권이 무엇인지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는 왕권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합니다. 왕은 단순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왕은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왕권이란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왕권’, 즉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지닌 자는 로마의 황제, 시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 왕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것도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들어가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3 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순례자들로 북적댔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경제법칙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먼 나라에서부터 온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소나 양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그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외국에서 생활하다 온 사람들이라 이들은 소나 양, 또는 비둘기를 그 먼 곳에서부터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소나 양,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나 환전상들은 유대인 순례자들에게는 편의를 제공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종의 공생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지요.

 

예수님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활동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대신 이처럼 종교활동에서 비롯된 수입은 고스란히 자신들이 차지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종교활동을 승인해 주는 대신에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챙겼던 것이지요.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종교활동을 보장해 주니까 유대인들의 원망을 들을 일도 없었고, 종교활동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짭짤한 수익을 챙길 수 있었으니까 금상첨화였습니다.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 유대인의 절기 때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몰릴수록 좋았고, 성전에서 소나 양, 비둘기 그리고 환전이 많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좋았습니다. 다만 로마 당국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민란을 대비해서 유대인의 절기 때 감시할 수 있는 군사병력을 조금 더 배치하면 됐습니다.

 

이러한 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던 부류가 또 한 부류 있었습니다. 바로 제사장 그룹입니다. 원래 제사장은 아론 계열의 레위인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유대 땅을 다스리던 예수님 시대에는 그 법칙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중에 영향력 있고 친로마 정책을 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로마 당국에 의해서 법적인 보호를 받으며 제사장으로 임명되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사가 온전히 드려졌을 수 없었고, 제사를 집례하는 일을 통해, 즉 종교활동을 통해 적지 않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제사장 그룹의 관심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 드리는 것에 있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배속만 채우는데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때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 정화 사건을 벌이입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 당시 종교는 타락할 때로 타락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습관처럼 모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는 위로를 받았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들만의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성전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있었고, 돈벌이 수단이 되어 있었고, 정권을 유지시켜 주는 권력의 안전장치로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그 당시 정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를 보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다른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요한복음이 다른 점이 이런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표적보다는 기적이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표적에 대한 이야기가 일곱 번 나옵니다. 첫 번째 표적이 그 유명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입니다. 이렇게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는 말씀으로 대응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그야말로 동문서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체를 일컬어 말씀하신 것인데, 영안이 열리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성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AD 70년경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성전이 무너집니다.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씌어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로마 당국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전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로마 당국은 누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눈으로 보기에,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이 거주하고 계셨던 성전을 로마 당국이 허물었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의 황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성전정화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의 미움을 삽니다. 이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암암리에 인정하고, 로마 당국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 황제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이방원이나 수양대군이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는가를 잠깐 살펴 보았습니다. ‘왕권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숙적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꼭 죽여야 하는 적으로 간주됩니다. 자신들의 왕권에 도전한 예수님은 이로써 꼭 죽여야 하는 숙적이 된 것이지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대로 신성모독죄와 국가반란죄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져 죽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성전이 헐리는 것을 보아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은 로마 황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생각에 제동을 겁니다. ‘왕권을 지니고 있는 자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헐었던 성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표적인 성전이 헐렸지만, 하나님께서 참으로 거주하고 계신 참된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 당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은 누가 왕인가를 보여줍니다. 생사여탈권을 로마의 황제가 쥐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신성모독죄와 국가반란죄의 명목을 씌워 십자가에 매달아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누가 왕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왕권은 로마 황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로마의 황제가 다스리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왕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자신이 왕권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는 존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누가 여러분의 생명을 위협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주장합니까? 무엇 때문에 여러분은 삶이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그러한 것에서 자유함을 얻으십시오. 그 길이 여기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한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누가 왕인가를 매일 같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나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존재에게 나의 생사여탈권을 내어주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삶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십시오. 주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에 저항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믿음의 채찍을 들고 뒤엎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지켜드리기 위해서 영적 전쟁을 치열하게 수행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왕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아멘.


* 참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이런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은혜를 못 받는다는 것이다. 참 딜레마이다. 훗훗.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