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2. 5. 14. 03:48

2012 5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로마서 13:8-14

제목: 사랑, 불가능한 가능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윤리가 사랑인데, 그것을 가장 잘 펼쳐 보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게다가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성서정과의 주제 또한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계명을 받은 우리들, 그리고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질문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 명령을 받아 든 우리들은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는 성경이 이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초등학교 시절, 보이스카웃이나 아람단 같은 단체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람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초등학교 6학년 때, 3공수여단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공수여단의 구호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참 멋진 말 같지만, 이것만큼 모순되는 말이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되게 합니까? “안 되는 것은 포기하라!”라든지, “되는 일을 찾아 되게 하라!”라는 말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는 한국이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말도 안 되는 무식한 구호가 난무했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똑같아 보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군사독재 시절 공수여단에서 보았던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구호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이상한,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는 깡패집단 인가요? 하기야 말씀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아,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능력이 기독교인에게는 부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 믿음만 가지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얼마 전 그러한 우매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금식을 열흘 동안 하다 쓰러졌는데, 사모님이 믿음으로 낫게 하겠다고, 그리고 목사님은 금식하다가 쓰러진 것이기에 삼일 만에 부활할 거라고(일어날 거라고), 믿음을 가지고 쓰러진 목사님을 방치하다가 죽게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목사님을 부검해 본 결과, 쓰러졌을 때 손을 썼다면 살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그냥 방치해서 죽게 만든 그 사모님은 경찰에 구속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에모든 것이 들어 있고,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면서, 왜 사랑의 빚은 져도 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이 이루어질 정도로 위대한 것일까요?

 

이것을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을 보면, 사랑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그 무엇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사랑을 일차적으로 꽃피워야 할 가정을 들여다 보면, 우선 사랑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부부 간의 사랑도, 부모자식 간의 사랑도 어딘가 모르게 날마다 불안합니다. 부족합니다. 특별히 부모자식 간의 사랑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원하고 숭고할 것 같으나,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자식을 그냥 방치하는 비정한 부모도 많고, 부모에게 몹쓸 짓을 하는 후려 자식도 많습니다. 사랑이 저절로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러니, 남남인 이웃에 대한 사랑은 묘연해 보이기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오늘 말씀은 갑자기 뚝 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13장에 나오는 말씀이니까, 그 이전에 사도 바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논증한 상태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것을 율법과의 문제에서 풀어냅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상 우리는 죄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아래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우리 인간에게서는 가능하지 않은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하나님 고유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들은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아닌 일그러진 사랑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사랑은 늘 부족하고 만족함이 없으며 선한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사랑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사랑이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인생을 살만큼 사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불가능한 사랑의 행위를 가능한 것이 되게 하는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 능력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옵니다. 11절 이하의 말씀은 그 상황을 종말론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자다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빛의 갑옷을 입자등의 표현은 종말론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표현들입니다. 이는 우리의 현실이 지금 우리가 눈에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서 우리의 영적 현실이 바뀌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영적 현실이 어둠에서 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각성할 때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 영적 각성은 14절의 말씀에서 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때 가능해 집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이 우리의 영적 현실을 올바로 바라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사랑의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봐야 하는 이 시기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부모님을 사랑해야 되는 데 왜 나는 부모님과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을까? 남편, 또는 아내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남편 또는 아내가 낯설기만 할까?(연애 할 때는 상대방의 몸에서 애기 향기가 나더니, 이제는 독소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식들에게 더 잘 해 주었어야 하는데, 뭐가 그렇게 살기 바쁘고 힘들었는지 더 잘해 주지 못한 자식 생각만 하면 가슴이 메어오지 않으십니까? 충분히, 그리고 서로 만족할만하게 사랑을 받고 베풀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삶의 모습 가운데 혹시 가슴 아파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죄책감에 싸이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그렇게 주저 앉을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게 되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명령하고 있듯이,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자, 즉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룰 때만 가능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영적 현실에 눈을 뜰 때만 가능해집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실존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온 존재를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면 이룰수록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멀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고, 있는 듯 존재가 희미했던 어머니가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남편 또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를 서로의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식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식을 한 인격체로 대하며 자식을 위한 진정한 밑거름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이웃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을 때 너무 좌절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함으로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의 능력이 충만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동영상을 하나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부모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부모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뿐만이 아닙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다 이웃(타자)인데, 이웃(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를 절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웃(타자)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서 동영상을 감상해 보십시오.)

 

동영상 클릭 -->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6872966

 

우리의 모자란 마음 때문에 상대방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는 상대방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모자란 마음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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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