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3. 10:23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눅 12: 13-21)

 

오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형과의 재산분할에 대한 분쟁 해결을 부탁한 일에서 촉발된다. 그 부탁을 예수님이 들어주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분쟁을 통해, 그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삼가 모든 탐심(All kinds of Greed)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

 

'탐심’으로 번역된 헬라어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α)욕심을 내는 것,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 더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 탐욕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플레오넥테스’(πλεονκτης)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탐심, 탐욕, 강탈, 사기, 욕심, 더 가지려는 탐욕의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리고플레오넥테스’(πλεονκτης)양이 더 많은, 질이 더 좋은, 우수한, 더 탁월함, 더욱 위대한, 더욱 긴, 더 큰 부분의 뜻을 가진플레이온’(πλεων)붙잡다, 소유하다, 잡다, 자각하다, 고수하다, 매달리다, 간직하다, 보관하다의 뜻을 가진에코’(χω)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김준남)

 

탐심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은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리 고 그 부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호칭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 이야기를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라고 부른다.

 

그는 왜 어리석은 것일까? 이 이야기를 단순히 탐심’, 그리고 재물에 대한 욕심등의 이야기로 보면 안 된다. 위에서 본 것처럼, 탐심은 질이 더 좋은, 우수한, 더 탁월함, 더욱 위대한, 더욱 긴, 더 큰 부분을 의미하는 단어 플레이온이 들어가 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소망하면서 산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질이 더 좋고 우수하고 더 탁월한 것을 사고 싶지, 질 나쁘고 형편 없는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지향은 그 어리석은 부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와 똑 같은 삶의 방식 가운데 살면서 그를 욕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것또는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도 그렇게 탐욕스럽게살면서, 왜 아닌 척하는가? 곡식의 소출이 풍성하면 더 큰 곳간을 지어야 하고, 곳간이 가득 차면 평안한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소망하며 산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자꾸 근대 자본주의의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습관이 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장의 개념도 12세기에나 형성된 것이고, 자본의 개념도 근대의 개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부자는 요즘 말하는 부자와 개념이 다르다. 요즘 부자는 자본가라고 불리지만, 성경의 부자는 굶지 않는 자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탐심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아니어도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는 인간의 덕목이다. 탐심이 많으면 좋지 못하다는 것은 인생을 조금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성경에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성경은 상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식 너머의 진리를 밝힌다.

 

오늘 말씀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탐심이 구원을 방해한다. 그래서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탐심이 작동하는 방식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탐심이 작동한다. 탐심은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자기 구원의 욕망이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욕망이 꿈틀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는 말로 포장하고, 삶의 구원을 위한 개인의 노력을 최고의 가치로 부추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이 노력한 만큼 소출을 쌓아 놓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그 분배가 노력에 비례할 때는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반비례할 때는 불의하다고 생각하며 폭동을 일으킨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는 말씀이다. 부자는 자신이 소출이 많아 곳간을 크게 짓고, 큰 곳간을 가득 채운 것에 만족하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 부자의 만족은 다른 만족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는 데서 오는 만족이다.

 

우리도 그렇게 산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직장, , 자동차, 각종 재산들, 등을 보면서 우리는 만족해 한다.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감사를 (하나님)’에게 드린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얻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삶의 토대가 여전히 소유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아주 기가막힌 반전이 일어난다. 부자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 원래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논리상 맞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소출을 도로 찾으리니 그래도 네가 평안하겠느냐?”

 

, 위의 두 가지 말씀 중, 우리는 어떠한 말씀에 더 분노할까?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아마도 모든 사람들)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더 분노할 것이다. 왜 그럴까? 탐심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확보한 구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후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후자처럼 산다. ,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느라, 힘들고 어렵게 산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부자가 어리석은 자여라는 호칭을 들은 이유는 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단순히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뻔한 설교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을 스스로 확보한, 부자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다. (요즘 불평등의 문제는 최고로 심각하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서 수많은 염려 가운데 살아간다. 삶에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근심 걱정 가운데 살아간다. 왜 그럴까?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확보한 소출을 구원의 토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부자에 이어 나오는 말씀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12:22-23). 그러면서 예수님은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라는 말씀을 하신다.

 

세상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라고 말한다. 자기의 구원은 자기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정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근심과 염려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성경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목숨과 몸을 위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평강 안에 머물라고 말한다.

 

누가 어리석은 자일까? 말씀에 등장하는 부자같은 자가 어리석은 자일까? 아니면, ‘까마귀처럼, ‘백합화처럼, ‘들풀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어리석은 자일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부자처럼 살아도 어리석은 자이고, ‘까마귀나 백합화, 들풀처럼 살아도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는 어떤 어리석은 자인가?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이 피난처  (0) 2017.12.02
식상한 예수, 그리스도  (1) 2017.11.28
어제보다 감사  (0) 2017.11.22
더불어 함께  (0) 2017.11.13
악인의 형통과 신앙  (1) 2017.11.10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