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13. 23:02

더불어 함께

(느헤미야 1:1-5)

 

한국에백인제라는 분이 있었다. 의사였는데, 일제시대를 겪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외과 주임교수 및 서울의사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구 선생과 함께 여러 정치적 활동도 활발히 하신 분이다. 이 분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에 납북되었다. 그리고, 그의 조카 백낙환 선생은 백부인 백인제 선생의 뜻을 기려, 백병원와 인제대학교를 세운다.

(중학교 때, 친한 친구가 백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그곳에 자주 가곤 했다. 그리고, 백인제의 또다른 조카 백낙청은 하버드대학교 영문학 박사 출신으로,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지냈고, 문학잡지 <창작과 비평>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학잡지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셨다. 한국에서 문학 공부한 사람 치고, 백낙청 교수를 모르면 간첩이다.)

 

의사 백인제 선생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의사 장기려 박사이다. 이분은 한국의 슈바이처 박사라고 불린다. 현재 부산에 가면, 장기려 박사 기념관 더 나눔이 있다. 이분은 한국전쟁 중 월남하여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개설하였는데, 이는 그의 서원에 대한 실행이었다. 기독교인(평양출신, 장로교)이었던 그는 경성제국대학교 의과대학 시험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한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이 몸을 바치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말 한대로 행하면서 살아가지 못할 때가 많다. 말과 행동의 일치는 인간의 평생 과제이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1). 이것은 느헤미야의 행동들이라고 번역 가능하다. 느헤미야는 언변에 뛰어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말 한 대로 실행에 옮기는 행동의 사람이었다.

 

기독교는 로고스(말씀)의 종교인 만큼,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은 행동이 있는 삶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신 수련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한 삶이다”(레노바레 성경, 주석). ,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을 듣고 행동을 통해 어떠한 형체로 보이게 끔 열매 맺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그래서 믿음만큼 창조적인 일도 없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생각하고, 결국 보이게 끔 만드는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관리였던 느헤미야는 어느 날 왕궁(수산궁)에 있었는데, 때마침 유다에서 온 하나니와 그의 동료들과 만남을 갖는다. 그는 그들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의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들로부터 슬픈 소식을 듣는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탔습니다”(표준새번역 개정판).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주저 앉아서 운다. 느헤미야 자신은 잘 먹고 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그냥 안타까운 마음만 표현하고 말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 말을 듣고 난 뒤, 오늘 말씀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1 5절에서 시작하여, 11절에 끝나는데, 그의 기도는 단순히 그 소식에 대한 애통의 기도가 아니고, 회개의 기도이며, 무엇인가를 행하려고 하는 믿음의 기도이다. 그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간청하여, 그의 기도와 소망대로, 예루살렘에 가서 성벽을 재건하는 일의 기록이다. 그래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말의 사람이 아닌, 행동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즘, 편지를 써 본 적이 있는가. 지금은 테크놀러지가 발달하여 서로의 안부를 이메일, 메신저, 전화, 또는 화상통화 등을 통해 전하지만, 옛날에 서로의 안부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는 편지였다. 편지, 하면 떠오르는 옛노래가 있다. 어니언스(양파)가 부른 <편지>이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젖은 편지

 

하이얀 종이위에 곱게 써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 버렸네

 

멍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흐르면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노래를 보낸다

 

편지는 고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통신수단이다. 로마시대 때, 로마인들은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첫 문장으로 이러한 문구를 썼다고 한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 이것은 이런 뜻이다.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 로마인들은 타인의 안부를 먼저 물으면서, 이러한 문구를 썼는데, 이것은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라틴어 수업, 144)

 

우리는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잘 살아야지, 남이 어떻게 살든 그것은 나의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위안하면서 산다. 그러한 생각이 우리의 삶에 들어온 것은 얼마 되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안부를 걱정했고,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생각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더불어 함께라는 생각은 흐려지고, ‘각자도생이라는 표어가 삶에 자리 잡은 듯하다. 그래서 요즘 한국에서 가장 잘 되는 사업이 각자도생사업이다. ‘혼술, 혼밥을 위한 사업이 잘 된다.

 

나는 이곳 실리콘밸리로 이사 와서, 자책감을 느끼는 것이 있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 보도블럭 위에 사시사철 한 곳에만 앉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한 노숙자(홈리스)를 볼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사진) 그 노숙자는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날씨가 좋으나, 꼼짝 않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곳에 이정표처럼 앉아 있다. 아니, 그곳이 자신의 집이고 땅 인양 앉아 있다.

 

그 노숙자를 보면서 나는 무력감을 느낀다. 매일같이 그 노숙자를 지나치지만, 나는 그에게 말 한 마디 걸어본 적도 없고, 무엇인가 그에게 선행을 베풀어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아무리 세계 최고의 기술이 발명된들, 거리에서 붙박이처럼 살아가는 그 노숙자의 인생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보듬어 줄 수 없다는 것에 허무함을 느낀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을 나의 바깥의 풍경으로 만드는 것 같다. 그곳을 지날 때, 자동차를 타고 자동차와 신호등의 흐름에 따라 ~’ 지나가고 마니, 그 노숙자에게 말을 걸 시간과 기회가 전혀 없다. 그 노숙자는 그야말로, 내가 머물고 있는 자동차 바깥의 풍경에 불과하다. 내 바깥의 풍경을 향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누군가에게 잘 지내십니까?’라고 진심어린 안부를 묻는 것도 어려운 시대에, 우리에게 느헤미야의 말씀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수산궁에서 편하게 사는 것을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동족(형제, 자매)이 예루살렘에서 고생하며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평안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에 몸소 가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감당한다.

 

의사 장기려 박사도 의사로서 돈을 벌어 자기의 안위만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환자의 평안이 곧 자신의 평안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서원했듯이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헌신한다.

 

우리가 모두, 느헤미야나 장기려 박사처럼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시 한 번 이마음만은 추스르면 좋겠다.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 내가 평안하면 그만이 아니라,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한 것이라는 이 마음, 이것은 우리가 놓치고 사는 더불어 함께라는 삶을 일으켜 세우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마음이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안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안부를 묻는 이유는 그 사람의 삶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평안하지 않으면, 내가 안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연결된 공동체이다. 이것을 유기적 공동체라고 한다. 이것은 요즘 한창 이슈인 생태신학의 기본적인 사상이다. 인간들 뿐만 아니라,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생명체계가 망가지면 모든 유기적 공동체가 위험에 처해진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라. 책임감을 갖고 물으라.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물으라. 나에게 있어 올해가 가기 전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망 하나는 걸어서 내가 사는 동네를 돌아다녀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풍경을 나의 바깥의 풍경이 아니라, 내 안의 풍경으로 삼고, 그 풍경과 더불어 함께 어떻게 살아갈 지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숙자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고,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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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