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2. 05:41

어제보다 감사

(창세기 4:1-8) 

(추수감사주일 설교)


본문의 양의 첫 새끼라는 어구를 보니 이 시가 생각났다.

 

양 세 마리

-      박상순

 

풀밭에는 분홍 나무

풀밭에는 양 세 마리

두 마리는 마주 보고

한 마리는 옆을 보고

 

오른쪽 가슴으로

굵은 선이 지나는

그림 찍힌

티셔츠

 

한 장 샀어요

한 마리는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보고

 

풀밭에는 양 세 마리

한 마리는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 보고

오른쪽 가슴으로

굵은 선이 지나는

그림 찍힌 티셔츠

 

한 장 샀어요

 

한 마리를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 보고

 

나는 이 시를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어 봤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소외가 발생한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

외로움이 발생한다.

인생은 그 자체가 함정이다.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곳간을 들여다보며 한 해를 돌아봤지만, 요즘 사람들은 은행 어카운트를 들여다보며 한 해를 돌아본다. 곳간에 쌓인 것은 실물이지만, 은행 어카운트에 싸인 것은 숫자이다. 그래서, 요즘엔 인생을 돌아보며 하는 감사도, 계산적이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우리는 넓은 들에 익은 곡식 ~ 황금물결 뒤치며를 부르지만, 사실 별다른 감흥은 없다. 우리는 지금 농경사회를 살지 않고, 산업사회를 살기 때문이다. 추수감사절을 요즘 식으로 드리자면, 농산품을 쌓아 놓는 게 아니라, 공산품을 쌓아 놓아야 한다. 돈다발, 또는 고급 승용차 등을 쌓아 놓고 예배 드리는 게, 산업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 어울리는 감사절의 풍경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공산품을 쌓아 놓고 예배 드리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일을 행한다면, 그것을 세속적인 일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실제로 우리가 삶 속에서 추구하는 것, 얻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은 농산품이 아니라 공산품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 비를 내려 주세요. 하나님, 곡식이 잘 익게 해 주세요. 하나님, 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구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추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장사가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경제사정을 좋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사업이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경쟁에서 이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은 경쟁하느라 힘들다. 그리고, 감사의 이유는 대개 경쟁에서 이겼을 때 발생한다. 분노의 이유도 마찬가지다. 경쟁에서 졌을 때 우리는 분노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아벨의 후예가 아니라, 가인의 후예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본문에서 보듯이, 가인과 아벨은 예배 경쟁을 하는 듯 보인다. 가인은 농사꾼으로서 자신의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며 제사 드렸고, 아벨은 양치기로서 자신의 양을 하나님께 바치며 제사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 이 사건은 가인에게 분노를 안겨준다. 그래서, 가인은 분노에 압도되어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물론, 가인과 아벨 이야기 뒤에는 수많은 함의가 포진되어 있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그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경쟁은 본질을 잃어버리게 하고, 상대를 소외시켜 (내 삶의 바깥 영역으로 밀어내기) 제거 대상이 되게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분노가 발생하고, 폭력이 발생하고, 죽음이 발생한다.

 

마태복음(20:20-28)과 마가복음(10:35-45)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 세베대의 아들(야고보,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이렇게 구한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일은 다른 제자들의 분노를 산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와 다른 제자들은 동일한 관점에서 예수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를 바라 보았다. 그들은 경쟁을 통해서 예수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해 보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경쟁은 이처럼, 가장 거룩한 곳에서도 서로에게 분노를 발생시키는 부정적인 기운을 만들어 낸다.

 

포항의 지진 피해로 수능시험 날짜가 미뤄졌다. 한국의 아이들(대부분 선진국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경쟁부터 배운다. 그것이 우리의 사회 구조다. 우리도 그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생득적으로 성적-경쟁에 민감하다.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보는 눈이 부족하고, 자녀들이 얼마나 성적을 잘 받아 오느냐(경쟁에서 이겼느냐)로 판단한다. 부모의 지갑을 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연 성적을 잘 받아 오는 것(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적표 가지고 오는 날을 가장 좋아하거나, 또는 가장 두려워한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다. 특별히 큰 아들이 민감하다.)

 

학교에서의 성적 구분은 간편하게 A, B, C, D (수우미양가, 양가집 자녀 많다.)등으로 하지만, 원래 전통적인 성적 구분은 Summa cum laude, Magna cum laude, Cum laude, Bene 등의 라틴어로 한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 할 때, Summa cum laude로 졸업하면 최고의 영예가 되고, 나중에 이력서를 쓸 때도 반드시 그것을 표기한다.

 

그런데, 라틴어의 성적 구분을 보면, 마지막이 Bene이다. Bene‘Good’이다. , 라틴어의 성적 구분에는 부정적인 표현이 없다. 모두 긍정의 표현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성적 평가 방법인 것이다.

 

경쟁 사회에 살다보니, 우리는 남보다 잘 해야 된다는 생각에 익숙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목을 멘다. 그래서 우리는 남보다 잘 하지 못할 때 열등감을 느끼고, 분노를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이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남보다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갈까?

 

독일의 드레스덴 미술관에 가면, 라파엘로가 1513-1514년에 그린 <시스티나의 성모>라는 그림이 있다. 그림을 보면, 성모가 성자를 안고 있고, 교황 식스투스가 교황관을 벗고 성모자(聖母子)를 알현한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근엄하다. 그런데,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면,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 두 아기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성경에서는 이 천사를 케루빔(Cherubim)’이라고 부른다. 두 아기 천사의 엉뚱한 표정 덕분에 다소 무거울 수 있는 그림의 이미지가 평온해진다. 그래서, 이 두 아기천사는 그 그림의 성모자나 교황 식스투스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끈다. (한동일, <라틴어수업>, 76-77)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이지만,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인생의 여정에 평안을 주는 생각의 전환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남보다 잘하는 것보다, ‘어제보다 잘 하는 것에서 만족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삶의 만족과 평안은, 남보다 잘 하는 것에서 오지 않고, 어제보다 잘 하는 것에서 온다는 것이다.

 

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왜 감사하는가?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남보다 좋은 처지를 감사한다. 다른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 있어서, 다른 사람은 굶고 있는데 나는 배부르게 먹어서, 다른 친구는 수능시험을 잘 못 봐서 대학에 못 갔는데 나는 대학에 합격해서, 다른 친구들은 좋은 부모님 못 만나서 고생하는데 나는 좋은 부모님 만나 호강해서등등, 우리는 수도 없이 남과 비교하여, 비교우위에 선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심지어,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도 감사한다. 다른 이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 멸망 당하는 데,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구원도 비교(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이 요즘 우리가 드리는 감사절의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이러한 감사들은 어느 순간, 분노로 바뀌기 십상이다. 누군가에 비해서 비교(경쟁)우위를 빼앗기면, 우리는 반드시 분노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비교(경쟁)우위에서 뒤쳐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비교(경쟁)우위에 기반한 감사는 또다른 감사를 낳지 못하고, 결국 분노만 낳게 될 뿐이다.

 

리스도인은 가인의 후예가 아니다. 성경의 족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가인의 자손에서 오지 않고, (아벨을 대신 한) (Seth)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경쟁에서 오는 분노를 피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감사를 배워야 한다. 그것은, 남보다 잘 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잘 해서 감사한 것을 배우는 것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를 공부하면 그의 동갑내기 4촌 형 송몽규가 등장한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 영화 <동주>를 참고하라.) 송몽규는 언제나 윤동주보다 앞서갔다. 윤동주는 앞서가는 송몽규에게 일종의 열등감을 느끼지만, 윤동주의 시에서 자주 보듯이, 그는 날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송몽규에 비해 뒤쳐진 윤동주였지만, 지금 우리는 송몽규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윤동주를 기억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의 길을 걸어간 자는 반드시 기억된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가. 우리의 감사는 어떠한 감사인가. 경쟁에서 이긴 감사가 아니라, 어제보다 잘 한 것, 어제보다 나아진 것에 대한 감사의 삶이길 소망한다. 우리의 생명은 남보다 가치 있어 ‘Summa cum laude’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이미 ‘Summa cum laude’이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어제 걸어온 길을, 오늘도, 내일도 힘차게 걸어가길 바란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 주실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