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4:59

누가 크냐

(마가복음 9:30-37)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을 들여다보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지나 가버나움을 가시는 중이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차 수난 예고를 하신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서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31).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어 2차로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었음에도, 그들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누군가의 친구가 되는 일,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일,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우선 사람들은 일단 자기 자신에게 먼저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직 그들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안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친구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들의 이권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의 관심은 이것이었다. “누가 크냐?” 이러한 관심은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누가 크냐에 관심을 갖는다. 이 세상의 작동 방식이 그렇다. 큰 자가 되어야만 섬김을 받고 무시 안 당하고 성공했다고 칭송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다른 이들보다 큰 자가 되고 싶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학벌 없는 사회라는 사회단체가 있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학벌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생겨난 단체였다. 그러나 최근 이 단체가 스스로 해단식을 가졌다. 더 이상 한국 사회는 학벌 사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벌이 없어져서 학벌 사회가 아니라, 학벌보다 더 무서운 요인이 학벌 문제를 집어 삼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본이다. , ‘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학벌이 중요한 사회가 아니라, 누가 돈을 더 많이 가졌느냐, 부모가 얼마나 경제력이 있느냐에 따라 사회의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한국 사회는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 등의 학벌을 가지고 있으면 사회적 지위 상승이 꽤나 보장되던 사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학교를 나와도 소위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으면 신분상승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자본, 즉 돈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사회가 된 것이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의 문제를 도상에서 토론한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메시아상 때문이었다. 이들은 지금 예수님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다. 예루살렘은 왕의 도시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이르면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될 거라 믿었다.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면 제자들 중 큰 자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크냐의 문제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들이 이렇게 날카롭게 신경전을 벌이며 누가 크냐의 문제를 따지고 든 이유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실 때 세 명의 제자만 따로 데려 가신 일 때문인 것 같다. 일종의 시기질투인 것이다. 예수님과 따로 변화산에 올라갔다 온 이들에게 높은 자리를 빼앗길 것이 두려운 다른 제자들이 변론을 주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전혀 잘못 이해한 결과일 뿐이다. 예수님은 이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제자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주신다. 이번 제자도의 핵심은 이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거스르는 혁명과도 같은 말이다. ‘누가 크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적당하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누가 크냐의 질문에 대한 답은 보통 학벌, , 지위, 명예 등이 결정한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큰 자가 되기 위해, 학벌을 쌓고, 돈을 모으고, 지위를 얻고, 명예를 추구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전혀 그러한 것을 말하기 않고, 큰 자의 덕목으로 오직 섬김을 말씀하고 있다.

 

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국회의원이 설거철만 되면 시장에 나가 몸을 굽신대며 장사하는 분들의 손을 잡아주고, 장보러 온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일 등이 섬기는 일일까? 섬긴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은 섬김이 무엇인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말씀하신다.

 

우리는 대개 섬김도 나를 위한 섬김을 알 뿐이다. 예수님이 말하는 섬김은 이런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는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여기서 영접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자. ‘영접하다는 말은 영어로 ‘receive’라는 단어를 쓴다. 풀어서 설명하면, ‘시인하다, 사랑으로 대접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다른 말로 하면, 상대방(타자)을 나와 동급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영접은 모든 차별이나 장벽을 없애고,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방과 나 사이에 벽을 세우고, 상대방을 차별하고, 무시하면서 나의 존재를 기뻐한다. 상대방이 나와 같다는 것을 인정하면 큰 일 날 것처럼 여겨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멀리한다. 그런 자는 큰 자가 아니다. 그런 자는 찌질한 자이다. 그런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는 자이다. 그런 자는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전혀 모르는 자이다. 그런 자는 오히려 예수님의 적이다.

 

누가 크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본질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벽을 허무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그분의 형제로 인정했다. 그야말로, 영접했다. 사랑으로 대접했다. 섬긴다는 것은 저 사람보다 큰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저 사람보다 작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큰 자가 아니다. 반대로 나이가 어리고 건강하다고 그래서 나이 많은 이를 이런저런 면에서 이길 수 있다고 해서 큰 자가 아니다. 돈이 많다고 큰 자가 아니다. 학벌이 좋다고 큰 자가 아니다. 유러피언이라고 해서 큰 자가 아니다. 잘 생겼다고, 예쁘다고 큰 자가 아니다.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큰 자가 아니다. 사회적 명예가 크다고 큰 자가 아니다. 큰 자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또는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큰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니, 누가 크냐의 문제로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는데, 그 사람을 나의 형제로 자매로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제자도란, 바로 이렇게 모든 이들을 섬기는 것, 즉 그들을 나와 똑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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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