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5:10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시는 예수

(마가복음 6:45-56)

 

본문의 이야기는 오병이어 이야기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 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병이어는 메시아적 만찬이었고, 오병이어는 주님과 함께 한 시간이었고, 오병이어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성만찬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이 자꾸,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진짜로(과학적으로) 일으켰는지 아닌지, 그리고, ‘예수님이 진짜로(과학적으로) 물 위를 걸으셨는지 아닌지에 가 있다.

 

성경의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은 별로 이롭지 못하다. 성경의 이야기는 과학적인 증명을 위해서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이 쓰인 시대는 과학적 세계관의 시대도 아니고, ‘신화적 세계관의 시대였다. 성경이 쓰인 시대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이야기,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를 접하며, 예수가 정말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어?’, ‘예수가 정말 물 위를 걸었어?’라는 것을 묻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은 고대인보다 상상력이 한 참 떨어지는 듯 하다.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자꾸 이게 과학적으로 가능해?’를 따지지 말고, ‘이게 무슨 뜻이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 전하고 있는 본질을 놓칠 수 있다.

 

마가는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일차적으로, 마가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그렇다고, ‘메시아는 물 위를 걸을 정도로 초능력을 지닌 분이어야 한다를 말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만약 메시아는 초능력을 지닌 분이야를 말하고 싶었다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 분명히, 십자가에서도 초능력적인 무엇인가가 발휘되었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는 십자가에서 무능하게 죽었다. 아무런 초능력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성경을 보면, ‘메시아는 초능력자라는 것을 마가가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 이야기가 메시아적 만찬오병이어의 이야기다음에 나오는 것을 주목하라고 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잔치를 벌인 뒤, 즉 예배 뒤에,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제자들과 예수님은 잠시 떨어져 있는 듯하다. 제자들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다’.

 

시간이 지나,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셨다. 여기서 제자들이 탄 배가 바다 가운데있었다는 것에 주목해 보자. 사명을 받고 파송은 받은 예수의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바다 가운데, 즉 삶의 현장 가운데 있다. 그런데, 그 삶의 현장, 바다 가운데는 잔잔하지 않고, “바람이 거스르므로 힘겹게 노를 저어야하는 곳이다.

 

우리 삶의 현장은 힘겹다. 얼마나 힘겨운가. 너무 힘겨워서 헉헉댄다. 우리는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 가지 바람 때문에 힘들다. 더 이상 세상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은 다른 이들보다 힘겨울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마가복음이 쓰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현장이 정말로 힘겨웠다. 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자유의 제약을 받았고, 생활이 불편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얼마나 힘겨운 삶의 현장인가!

 

이렇게 힘겨운 삶의 현장을 예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신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헉헉대며 힘겹게 노 젓고 있는, 바다 한 가운데, 삶의 현장 한 가운데로 오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제자들도 자신들의 배가 떠 있는 바다 한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유령인줄로 착각했다. 유령인줄로 알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은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얼마나 위로되는 말씀인가.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배 위에 올라 타신다.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힘겨워 하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에 올라타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그렇다. 그들을 힘들게 했던 바람이 그쳤다. 주님이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시면, 바람이 그친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주님을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모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제자들은 방금 전에 오병이어를 나누며, ‘떡을 뗐는데’, 그것을 금새 까먹었다. “이는 그들이 그 때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2).

 

우리도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도 매주일 예배를 드린다. 예배 드리며,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고, 우리는 주님께 세상으로 파송 받아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서면, 우리도 금방 까먹는다. 우리의 마음이 둔해져서, 우리가 누구인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조차 마음이 둔해져서 깨닫지 못한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이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슬러 우리의 삶,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들을 막아 주시기 위해, 우리와 동행하기를 꺼리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언제든지 오신다. 그것이 바다 건, 산이건, 광야 건 상관 없이,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오신다.

 

예수님과 함께 한 그들의 사역을 보자. 그들은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 땅에 도착한다. 그곳에서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실패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에게로 왔고, 예수님에게로 온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 “사람들이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55-56).

 

마음을 열라. 그러면 여러분의 삶의 현장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감격,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라.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는 도전들, 어려운 일들, 여러분의 눈에 눈물 나게 하는 일들을 모두 그치게 하실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주님은 결코 우리를 혼자 세상으로, 삶의 현장을 보내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삶을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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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