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4:54

이혼 문제

(마가복음 10:1-16)

 

제자도의 틀에서 생각해 보자. 제자란 이제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사는 자들이다.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요단강 동편의 베레아 지역으로 가셨다. 거기에서 바리새인들과 다시 한 번 대결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Testing Him’,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사람이(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2). 여기서 버리다이혼하다의 뜻이다. , 이혼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는 질문이다.

 

이들이 이혼에 관하여 묻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것을 뚝 떼어 놓은 채, ‘이혼에 관한 문제를 들여다보면 엉뚱한 말씀을 전하게 된다.

 

일단 이들이 이혼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는 성경구절은 신명기 24 1-4절의 말씀이다.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또한 그 당시 로마 사회에서 이혼은 쉽게 행해지던 일이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풍습이 전파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 처치할 죄목을 찾고자 했다. 우리가 알다시피, 헤롯 안티파스는 형제의 아내를 취했고, 이 일(이혼한 일)로 인해서 세례 요한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결국 요한은 그 일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이혼 문제는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매우 민간한 사안이었다. , 어떻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목숨이 오락가락했다.

 

그 당시는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가부장적 사회(남성중심적 사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성 이외의 존재는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이혼은 남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우는 도구 밖에 되지 않았다.

 

신명기서의 말씀은 이혼의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혼으로부터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여자가 싫어졌다고 마음대로 이혼하지 못하게 법적으로 구속하는 것이다. 신명기서 문구에서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은 남자가 여자를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법이다. 그런 사유가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여자에게 꼭 써줘야 한다. 이것은 이혼을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여자가 이혼에 의해서 버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이다.

 

예수님은 이혼 문제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근거한 대답을 내어놓으신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6-9). 여기서 짝지어 주셨다는 것은 멍에를 함께 씌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함께 곁에서 멍에를 멘이라는 뜻이다. 멍에를 함께 멨기 때문에, 이제 결혼한 두 사람(남자와 여자)는 함께 가야 하는 운명 공동체가 된 것이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거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평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와 여자는 멍에를 함께 멘 사람이지, 여자가 남자의 멍에를 멘 것이 아니다. 남자 마음대로 여자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다. 옛날에는 그랬다. 여자의 운명은 남자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여자의 존재, 여자의 인권이 거의 없었다. 모두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깨시고 있다. 남자의 편의대로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름과 같이 결론을 내신다.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11-12). 우리가 알다시피, 십계명에 이혼죄는 없지만, ‘간음죄는 있다. 간음을 범한 자는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 그만큼, 중한 죄라는 뜻이다. 그만큼, 남자가 마음대로 여자를 무시하는 죄는 크다는 뜻이다. (물론 그 반대로 똑같이 해당된다.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면 안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매우 충격적인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인 여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시며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윤리를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어린 아이에 관한 가르침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혼 문제에 이어 곧바로 나오는 이야기가 어린 아이에 관한 교훈이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다. 그것을 본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이런 가르침을 주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4-15).

 

그 당시, 여성보다 더 존재감이 없던 존재가 어린이였다.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중의 약자였다. 요즘처럼 아이를 금이야 옥이야 키우는 세대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나이 드신 분 중에는 어린 시절에 자신들이 얼마나 존재감이 없었는지 기억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예수님은 존재감이 전혀 없던 아이들을 가리켜, 그들과 같이 받들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파격적인 선언이다. 그 당시 그 누구도 어린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애들은 그저 무시만 당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이 말을 깨달은 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무시당하고 거절당한 사람들, 즉 병든 자, 소외된 자, 이방인, 여자,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인정받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나라이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방인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여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모두 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다.

 

제자도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와 좀 다르다고, 나보다 힘이 약하다고, 나보다 좀 못나 보인다고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적 가치관에 갇힌 자들은 아직까지 차별과 무시와 거절을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제자는 모든 사람을 나와 같은 이로 받아들이며,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 것이다.

 

여러분은 제자인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고 있는가? 혹 세상적 가치관에 따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말씀은 단순히 이혼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사는 자들은 여전히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로 갈라서는 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사는 자들은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함께 곁에서 멍에를 멘자들 답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평화롭게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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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