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13. 12:08

도피성의 사회학

(여호수아 20:1-9)

 

첫번째 질문: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피성은 누구를 위한 제도입니까? (3) 이것은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한 제도이다. 여기서, ‘부지중에 실수로라는 말과 사람을 죽인 자가 대립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나, ‘부지중에 실수는 법의 보호를 받는다.

 

그런데, 이것이 참 애매한 일이다. ‘부지중에 실수는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죽인 자가 내가 죽였다라고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요즘 보니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긴 하다. 테러조직들이 그렇다. 특히 IS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의 배후를 자처하고 나선다. 그것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사람은 사람을 죽이면 자신이 죽였다고 하지 않는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 때부터 그랬다.

 

두번째 질문: 도피자는 누구에게 자기의 사건을 말해야 합니까? (4) 도피자는 도피성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자기의 사건을 말해야 한다. 장로들은 그 지역의 어른들을 말한다. 어른이 되는 일은 참 쉽지 않다. 어른은 부지중에 실수사람을 죽인 자라는 대립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 둘 사이의 대립을 지혜롭게 분간하지 못하면, 살인자를 불의하게 용납하거나 또는 부지중에 실수로 저지른 일에 불의하게 철퇴를 가할 수 있다.

 

세번째 질문: 도피성이 있는 곳은 각각 어디입니까? (7~8) 도피성은 요단강 서편(가나안땅) 세 곳, 요단강 동편 세 곳, 총 여섯 군데 있다. 요단강 서편의 도피성은 납달리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이다. 그리고 요단강 동편의 도피성은 르우벤 지파의 베셀과 갓 지파 중의 길르앗 라몬과 므낫세 지파 중의 바산 골란이다.

 

여호수아에서 도피성 이야기는 각 지파별 기업을 모두 나눈 후에 나온다. 다시 말하자면, 도피성은 땅을 분배하기 전 먼저 떼 놓은 것이 아니라, 땅을 모두 분배하고 그 중에서 다시 선별한 것이다. 받기 전에 떼어 놓는 것은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으나, 받은 후에 다시 내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일에 서쪽에서는 납달리 지파, 에브라임 지파, 유다 지파가 참여하고, 동쪽에서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가 참여한다. 물론, 요단강 동편의 지파는 모두 참여한 것과 같다.

 

그들은 그들의 성읍 중 하나를 도피성으로 선뜻 내놓을 수 있었을까? 선정된 성읍은 반발이 없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받은 땅을 다시 내어놓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도피성을 만든 이유는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함이다. 더군다나, 그 성은 살인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살인자 앞에 부지중에 실수로라는 수식어가 붙긴 하지만, 자신의 거주지에 살인자를 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 혐오시설로 분류되어 입주를 꺼리는 것들이 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시설은 발달장애아동학교였다. 입주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시설이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지고, 자신의 정상아이들이 영향을 받아 교육에 좋지 않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에 대해, 장애아동을 둔 부모들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자녀들이 동등하게 교육받을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고, 장애아동은 혐오스런 존재가 아님을 눈물로 주장했다.

 

이러한 사건을 보면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정의를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정의란 내가 잘 먹고 잘사는 생존이다. 남의 아픔과 고통이 내 땅값을 떨어뜨리면 안된다. 나에게 아픔과 고통은 땅값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피성으로 자신의 성읍을 내놓은 사람들은 정의에 대한 개념을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도피성은 일종의 감옥이다. 도피성으로 피한 자는 두 가지가 충족될 때까지 도피성을 떠날 수 없었다. 도피성으로 피한 자는 회중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 했고,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피성은 공동체(사회)를 정의롭게 세워 나가고자 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의지이다. 무분별한 피의 복수는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지 못하고, 결국 공동체를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실하게 살았을 것이고, 도피성의 회중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을 것이다. 도피성으로 피한다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도피성으로 피하면 죄를 지어도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 우리는 도피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상징에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마치, 죄를 지어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피하면 아무 죄가 없는 것이 되고 해를 당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 피한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책임을 끝까지 져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끝까지 책임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그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주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다. 도피성은 그들이 받은 것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십일조) 헌금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은 정의를 세우는 일에 쓰여야 한다.

 

도피성의 사회학은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평안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하나님의 통치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면,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를 평안케 하는 일에 써야 할 것이다.

 

무엇인가를 소비하고 드릴 때 이것이 도피성처럼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평안케 하는 것인지,’ 잠깐만이라도 생각해 보고, 소비하고, 드리고, 행하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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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