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6. 02:52

삼위일체와 우리의 미래

(마태복음 28:16-20, 고린도후서 13:11-13)

 

1. 이게 무슨 곡인지 맞춰 보라. 

강강술래.mp3
2.76MB

 

2. 강강술래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강강술래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강강술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 8호이며,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가무형문화재 1호는 종묘제례악이고, 5호에는 판소리가 지정되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목록을 보면 현재 150개 정도 지정되어 있다. 강강술래가 가진 가치와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고 크다. 강강술래는 주로 전라도 도서지역인 해남·무안·진도·완도 등지에서 음력 8월 15일 밤(추석)에 예쁘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공터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만들어,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는 놀이이다.

 

3. 다음과 같은 재미난 유래도 있다. “정유재란의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수병(수군)을 거느리고 해남의 우수영에서 왜군과 대치할 때의 일화가 있다. 조선 수병들이 매우 많은 것처럼 보여 왜군이 함부로 침입해 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하여 부녀자들로 하여금 남자 차림을 하고 떼지어 올라가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게 했다. 그러자 바다 위의 왜군들은 이순신의 군사가 엄청나게 많은 줄로 알고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한다. 싸움이 끝난 뒤 부근의 마을 부녀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즐기던 것이 바로 오늘날의 강강술래라 한다. 따라서 한자어 '강강수월래(強羌水越來)'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고 해석된다는 것이다.”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연관지어 설명한 유대이다.

 

4. 그러나 백과사건의 설명에 따르면 강강술래가 이순신 장군의 의병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강강술래>는 원시시대의 부족이 달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유습(풍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달의 운행원리에 맞추어 자연의 흐름을 파악하였고, 따라서 우리 나라 세시풍속에서 보름달이 차지하는 위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즉, 달이 가장 밝은 추석날이나 정월대보름날이면 고대인들은 축제를 벌여 춤과 노래를 즐겼고, 이것이 정형화되어 <강강술래>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승된 <강강술래>를 이순신이 의병술(擬兵術)로 채택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널리 보급되고 더욱 큰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5. 삼위일체 주일이다. 삼위일체 주일에 강강술래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말한 이유는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가 우리나라 전통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정말 다행이고 축복이다. 기독교의 신론은 유일신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니다.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개의 문화가 있다. 히브리 문화와 그리스 문화다. 히브리 문화는 유일신 문화다. 그리스도 문화는 다신론 문화다. 이후에 그리스 신론은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해서 매우 철학적이고 사변적으로 변하여, 기독교에 영향을 미친다.

 

6.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의 신앙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점은 신론이다. 기독교 신론은 유일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니다. 기독교의 신론은 삼위일체론이다. 기독교 신론을 까닥 잘못 해석하면, 유일신론에 빠지거나 삼신론(다신론)에 빠질 수 있다.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기 전까지, 300여년 동안 기독교는 유일신론도 아니고 삼신론도 아닌, 삼위일체론을 세우기 위해서 무한한 노력을 했다.

 

7.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론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은 용어인데, 이후의 신학자들이 철학적/신학적 사유를 통해서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이다.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세워 나간 교부들이나 신학자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는 삼위일체론을 발명한 것이 전혀 아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삼위일체론을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경험이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스스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만큼, 보여주시는 것만큼만 알 수 있다. 그것을 계시(revelation)이라 한다.

 

8.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경험했다. 그렇게 경험한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유일신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닌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9. 삼위일체를 말할 때 기독교인들조차도 헷갈려하는 것은 이것이 수학놀이인줄 안다는 것이다. 1+1+1=1. 이렇게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삼위일체론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1+1+1이 1이 될 수 있냐고 말이다. 1+1+1=3이 되어야지. 이것은 삼위일체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고, 삼위일체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방증일 뿐이다.

 

10. 삼위일체는 수학이 아니라 교제(fellowship/relationship)를 나타내는 말이다. 삼위일체는 신적 교제이다. 그리고 피조물과의 교제이다. 삼위일체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교제(fellowship)의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용어는 ‘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이다. 이것은 그리스어이다. 초대교회의 신실한 교부들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포착하여 표현한 언어가 ‘페리코레시스’이다. 초대교회는 그리스어를 썼다. 7세기 이후 이슬람의 등장과 함께 동방교회 지역이 모두 이슬람화 되면서, 그 이후 교회의 언어는 라틴어로 바뀌었지만, 그 이전까지 교회의 주류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씌어진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바꾼 것을 셉투아진트(Septuagint, 70인역)라고 한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어 구약성경을 봤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에 인용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은 모두 그리스어 구약성경인 셉투아진트이다.

 

11. 교부들이 삼위일체가 무엇인지를 그림언어로 포착한 것이 ‘페리코레시스’이다. 내가 위에서 강강술래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페리코레시스의 뜻은 ‘빙글빙글 돌면서 춤춘다는 뜻’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강강술래’가 딱 페리코레시스이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려면, 한 사람이라도 슬픔과 고통에 짓눌려 주저 앉아 있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슬픔에 주저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위로하고, 안아주고, 그가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12. 페리코레시스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깊이 침투하는 사건을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깊이 침투하여, 슬픔에는 슬픔으로 안아주고, 기쁨에는 기쁨으로 반응하여, 서로가 서로의 삶을 깊이 보듬어 주며, 그 무한한 기쁨과 사랑을 서로 공유하며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강강술래 춤을 추는 것이, 페리코레시스이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삼위이면서 하나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림언어로 포착한 것이 페리코레시스이다. 우리의 용어로는 강강술래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13.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주일을 맞아, 주님의 말씀을 받아, ‘삼위일체와 우리의 미래’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살펴보고 있다. 우리가 오늘 받은 말씀은 그래도 명시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는 말씀들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선교적 사명을 전달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사명을 전달하고 있고,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위로하고 축복하고 있다.

 

14. 삼위일체는 사변(상상물)이 아니라, 실재이다. 우리의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실재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래도 소망을 가지고, 힘을 내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시며 우리에게 그 기쁨과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힘을 낼 수 있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 이 세상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이다. 무한한 사랑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실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15.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페리코레시스의 모습으로 존재하시고,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을 계시해 주신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고 이유이다. 슬픈 일을 당했거든 그 슬픔 때문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가장 낮아지는 순간은 실패했을 때, 병들었을 때, 육신이 약해졌을 때, 그리고 죽음을 맞딱드렸을 때 등이다. (사랑과 생명이 적을때) 그런 슬픔 가운데 처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 더 당당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페리코레시스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무한한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16. 우리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우리이기도 하고, 개인으로서의 우리이기도 하다. 우리 공동체의 미래, 내 삶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가.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사랑하고,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이시구나. 강강술래이시구나. 저렇게 사랑과 기쁨이 넘치시구나. 저렇게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보듬어 안으시며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구나. 이것을 알고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우리 개인의 삶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17.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은 종말론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의 기쁨과 생명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아픔과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온전히 위로 받기 전까지 우리의 구원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슬픔과 고통이 없다고, 나는 구원받았다고, 나만 기뻐할 수 없다. 구원은 관계적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으면 나의 구원도 아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향해 나가가고 있는 중 일뿐이다. 선교란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에서 소외되는 자가 없도록 돌보고 그들을 기쁨과 생명으로 초대하는 일이다. 구원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이웃에게 달려 있다. 이웃의 구원이 곧 나의 구원이다. 구원은 이렇게 철저히 관계적이다.

 

18. 우리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가 드러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게 부흥 아닌가? 우리 사회(세상)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가 드러나는 사회(세상)가 되길 소망한다. 그게 좋은 사회(세상), 사람 사는 사회(세상), 행복한 사회(세상) 아닌가? 우리의 개개인의 삶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가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게 정말 의미 있는 삶, 거룩한 삶, 구원받은 삶, 행복한 삶이 아닌가? 삼위일체에 우리의 모든 미래가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 더 간절히, 더 진진하게, 더 유쾌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예배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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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