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9. 05:54

[장어와 한국교회]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한 번에 한 책만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책을 읽을 때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다. 물론 책들마다 장르가 다르다. 나 같은 경우도 문학책, 철학책, 역사책, 시집/소설, 신학책, 그리고 자기계발서류책 등을 동시에 읽어 나간다. 요즘 내가 읽는 책 중에 <나비처럼 읽고 벌처럼 쓴다>라는 비평수업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이다. 일본인 저자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학문적 역량이 꽤 높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지식의 저력이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어 저작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축적된 지식의 저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은 한글로 된 저작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지 못한 까닭도 크다.

 

세종대왕 시대부터 한글이 쓰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으로 된 책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근대에는 일제의 영향으로 일본어로 된 저작이 상당수 축적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근대문학을 전공할 때도 일본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한국 근대 문학은 일제강점기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그때 문인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한글뿐 아니라 일본어로 저작을 남겼다. 윤동주도, 이상도 그렇다. 그래서 한국 근대문학을 공부하는데 일본어는 필수다.

 

일본인이 쓴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의 역사 경험과 한국인의 역사 경험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지금 읽고 있는 비평수업 책인 <나비처럼 읽고 벌처럼 쏜다>에서도 그것이 드러난다. 일례로, 비평을 설명하면서 쓰기에 대한 수업을 진행할 때 예로 쓰이는 문학작품은 『금빛 여우』라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장어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장어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하는 부분에서 일제강점기 시대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또한 1930년 전후의 신문 기사를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자 장어의 영양이나 조리법 등에 관한 다양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 항목의 첫머리에 인용한 것처럼 1930년에는 장어의 치어가 한국이나 중국에서 공중 운송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조선’이나 ‘지나’라는 단어가 사용된 점도 포함해서 식민지주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제목입니다. 아무래도 장어는 당시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적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을 만큼 매우 관심 있는 식재료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155-156쪽).

 

만약 한국인이 이와 같은 비평수업 책을 저술했다면 어땠을까? 동일하게 장어에 대한 주제로 비평수업을 진행할 때, 일제감정기에 저술된 문학작품에서 그 예를 가지고 왔다면, 지금 일본인이 서술한 것과 완전히 다른 역사 경험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장어 때문에 제국주의적 권력에 희생당한 조선인들의 애환이 담긴 작품이었을 것이다. 동일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한쪽에서 장어는 제국주의적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을 만큼 매우 관심 있는 식재료였고, 다른 한쪽에서 장어는 착취를 연상시키는, 치가 떨리는 식재료였을 것이다.

 

제국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의 역사인식과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의 역사인식이 같을 수 없다. 경험이 다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른 역사경험을 가진 두 나라, 일본과 한국이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을 같이하며 동반자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정말 쉽지 않아 보인다.

 

별생각 없이 맛있게 먹었던 장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식탐을 채우기 위해 제국주의적 권력을 조선인들에게 휘둘렀다는 역사를 알게 되니까 장어를 더 이상 맛있게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민족적 저항의식이 생겨나는 듯싶다. 하지만, 내가 별 시답지 않은 장어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로 고민한 것은 ‘교회’이다. 물론 이것도 직업병이겠다.

 

한국교회는 왜 이렇게 뒤틀려 있을까? 장어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은 한국교회에는 한국인의 역사경험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역사경험은 결코 제국주의자들과 같지 않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제국주의자들의 경험이 반영된 신학과 실천이 더 주류를 차지한 것 같다. 약자의 경험이 더 반영된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강자의 경험이 더 반영된 교회 같다는 뜻이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빌리 그래함 목사 한국 전도대회 50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다. 그 행사에 약 7만명 정도가 ‘동원’됐다. 그 대회를 주관한 교회들이나 목사들, 그리고 거기에서 선포된 ‘메시지’를 보면, 여전히 전도방식이 ‘제국주의적’이다. 무엇보다 목적을 위해서 교인들이 ‘동원’되는 점이 그렇다. 또한 내가 그 기사를 보면서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그 많은 인원이 여러가지 이유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곳에 ‘동원’됐다면 어땠을까 였다. 그랬다면 그것은 ‘동원’이 아니라 ‘참여’가 되었을 것이다.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마침 세월호 9주년 기억예배가 있어서 안산생명안전공원에서 열린 예배에 참석했다. 약 500명 정도가 참석했다. 주최 측에서는 이것도 많은 인원이라며 기뻐했다. 더군다나 예배를 방해하는 세력이 없어서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왜 사람들은 이곳에 생명안전공원이 세워지는 것을 싫어햐나고. 그랬더니, 대답이 아주 난감했다. 땅값 떨어지는 것을 걱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같이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그러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그런 걱정을 덜어주는 정책을 펴면 될 것이다.

 

다만, 그곳에 한국교회가 합심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 한국 전도대회 50주년을 기념하는 대신에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바로 그곳에 7만명이 함께 모여 예배 드렸다면, 세월호 문제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비화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벌써 사건규명을 명확하게 하여 책임자 처벌과 향후 안전대책, 그리고 유가족 돌봄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 빌리 그래함 목사가 뭐라고 그 사람의 전도대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수억원을 써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한국사회와 교회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본인이 쓴 비평수업 책 한 권 읽으면서 나의 생각은 왜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충분히 반영된 신학과 실천을 토대로 교회가 세워지고 미래를 펼쳐 나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들의 역사경험을 무시한 채 교회가 세워지면, 교회는 여전히 유체이탈 교회로 ‘영혼구원’ 타령만 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말하는 ‘영혼’이란 도대체 어떤 영혼인가. 그러나 저러나, 장어를 먹기 힘들게 됐으니, 기력을 어떻게 보충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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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