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14. 05:59

쉐마신앙

ㅡ 눈의 문화에서 귀의 문화로!

(창세기 11:27-12:9)

 

1. 창세기는 큰 이야기들로부터 시작한다. 천지창조의 이야기.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야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홍수 이야기),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냥 흥미거리로 써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들이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2.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간다”는 말처럼, 공부를 해보면, 우리가 창세기의 첫 열 한 장에서 무엇을 읽고 가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 같다. 그만큼 창세기 첫 열 한 장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고, 그것을 해석해 내는 일이 쉽지 않으며, 그것을 들여다볼 때 아주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분명한 것은, ‘내 눈에서 무엇을 읽어가든’ 그것이 너와 나 사이에 평화가 있는 해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창세기의 첫 열 한 장은 인간의 실존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림언어로 제시함으로써, 인간이 어떻게 하면 서로 죽이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는 “You shall not kill me.”라는 윤리적 대전제를 만들어, 서로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전개시키기도 했다.

 

4. ‘이게 뭐지?’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큰 이야기들이 쭉 나온 이후에, 뜬금없이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람이다. 아브람의 이름은 ‘강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브람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바로 전에,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이야기가 짧게 등장한다. 데라는 아브람의 아버지다. 아브람은 그의 아버지 데라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를 떠난다.

 

5. 인간은 어린 시절이 중요하다. 어린 시절 무엇을 경험했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성경은 아브람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제공하지 않고 있다. 창세기 11장 27~32절에 걸친, 아주 짧은 정보를 통해서 아브람의 어린 시절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브람의 아버지는 데라이고, 데라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가 아브람이었고, 둘째가 나홀이었고, 셋째가 하란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데라의 셋째 아들, 즉 막내 아들이 일찍 죽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곳은 그들의 고향 갈대아의 우르였다.

 

6. 그들의 결혼 이야기도 나온다. 첫째 아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을 했는데 자식이 없었고, 둘째 나홀은 밀가나와 결혼을 했는데, 밀가나는 하란의 딸이었다. 근친결혼이 이루어진 듯하다. 이것은 고대근동 지방에서 평범하게 발생하던 일이었다. 근친결혼, 계대결혼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가족 문화 중 하나였다. 이야기는 사래에게 집중된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아들 아브람 가족과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계획이다. 아마도, 둘째 아들 나홀 가족은 그냥 갈대아 우르에 계속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7. 그런데, 원래 계획이 틀어지는 정황이 아주 짧게 나온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던 데라는 하란에 이르러 그 마음을 바꾸고 그냥 하란에 정착해서 산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하란 땅에서 죽는다. 아버지 데라가 왜 가나안 땅으로 가는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하란 땅에 정착하여 거기서 죽을 때까지 살았는 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다만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세겜에 모아놓고 마지막 설교를 할 때,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이름이 등장한다.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 24:2).

 

8. 무슨 이유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란에 주저 앉아 살았다. 그리고, 여호수아에 의하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지 못하고 하란에 주저 앉아 산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우상숭배였다. 여기서 우상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우상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중간에 주저 앉히게 만드는 힘이고 유혹이다. 마음을 빼앗아 원래 집중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우상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어떤 실체에도 덧씌워져서 힘을 발휘하는 어떤 세력이다.

 

9. 창세기 12장 1절은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의 계획을 물려 받는 장면이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 땅은 다른 곳이 아니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원래 가고자 했던, 가나안 땅이었다. 아버지 데라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실패했지만, 아들 아브람 덕분에 그 목적을 달성한다. 이 지점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이제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어른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야말로, 아버지에게 종속된 추종자에게서 벗어나, 이제 독자적으로 삶을 꾸려가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10. 추종자와 지도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추종자는 눈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지도자는 귀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상은 우리의 눈을 유혹한다. 우상은 눈의 문화를 발달시킨다.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그것을 추종하게 만든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덴 동산에서 발생한 선악과 사건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나타나 하와를 유혹한 것은 눈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가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11. 추종자들을 만들어 내어 그에게서 이익을 취하려 하는 자들은 모두 눈을 유혹하는 스펙터클을 생산한다. 화려하고 큰 것,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혹하게 만드는 것을 만든다. 우리 시대가 그렇다. 온갖 것들이 그렇다. 눈을 못 떼게 만든다. 우리의 눈을 붙잡아 두는 문화를 만든다. 눈이 즐거워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에 홀린듯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따라 간다. 우리는 추종자로 살아간다.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앉는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처럼.

 

12.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그것의 추종자가 되지 않는다. 지도자는 귀의 문화를 따르는 사람이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하란 땅에 눌러 앉아 살지 않았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현대인이 가장 잘하는 것은 눈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무엇이 예쁜지, 무엇이 고급스러운 것인지 잘 안다. 그리고 무엇이 수치스러운 것인지 잘 안다. 현대인은 남의 눈에 미치지 못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 그래서 남의 눈에 좋게 보이려고, 온갖 외형적인 것을 갖추기에 바쁘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비용을 쓴다.

 

13. 아브람이 강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많은 민족들의 아버지)으로 거듭난 이유, 이름이 바뀐 이유는 그가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서 추종자로 머물러 산 게 아니라,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세밀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지도자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히 들렸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그러나, 에덴동산에 있던 하와와 아담(사람들)은 들리는 것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고 보이는 것에 의해서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망했다. 눈의 문화보다 귀의 문화가 중요하다. 에덴동산은 그것을 알려준다.

 

14. 아브람이 왜 아브라함이 되어, 우리의 믿음의 조상, 즉, 우리의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눈의 문화가 거침없이 발전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귀의 문화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눈의 문화와 귀의 문화는 대척점에 서 있다. 눈의 문화는 휘황찬란하다. 그러나 귀의 문화는 고요함을 추구한다. 휘황찬란 한 곳에서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은 신명기 6장 4절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것을 ‘쉐마’라고 한다. 구약성경은 쉐마신앙을 말하고 있다.

 

15. 하나님은 우리를 추종자가 아니라 지도자가 되라고 부르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을 최대한 멀리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여 우리를 그곳에 붙들어 놓으려고 한다. 데라가 하란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하란 땅에서 눈의 문화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하란은 우르로부터 북쪽으로 960km 떨어진 지역에 있는데,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최고로 발달한 상업도시였다. 왜 데라가 하란을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우상숭배에 빠졌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16.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눈의 문화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요즘 시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너무도 눈의 문화가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믿으려 하지 않고, 배척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쉐마의 하나님’이시다.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하나님이시다.

 

17. 실제로 현대인들이 가장 잘 못하는 게 귀를 기울이는 것 아닌가. I am listening. I am all ears. 이것은 내가 너에게 온전히 귀 기울이고 있다. 내가 마음을 온전히 너에게 두고 있다. 나는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라는 뜻이다. 우리 가운데 왜 그렇게 평화가 없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나도 잘 못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상대방에게 가장 서운할 때가 언제인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을 때이다. 그러므로, 눈의 문화가 극도로 발달된 이 시대에, 우리가 주의하며 다시 되찾아야 할 문화는 귀의 문화이다.

 

18. 눈의 문화에 압도당한 이들은 그저 추종자가 될 뿐이다. 그러나 눈의 문화에서 벗어나 귀의 문화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줄 아는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지도자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어서,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살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추종자가 되지 말고, 지도자가 되자.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들려오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가 되자. 그러기 위해서 오늘부터 당장, 핸드폰을 좀 내려놓고, 여러분이 사랑하고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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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