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20. 05:51

미래를 여는 신앙

(창세기 23:1-11)

 

 1. 성경을 읽다보면, 삶의 추억을 되새겨 주는 본문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창세기 23장의 이야기가 딱 그렇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죽은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서 매장지를 가나안 땅의 원주민 헷족속에게서 구입하는 이야기다. 127세에 세상을 떠난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땅을 산다. 그곳에 굴이 있었다. 막벨라 굴. 아브라함은 이곳에 죽은 아내 사라를 묻는다.

 

2. 조지아에서 목회할 때, 이 구절을 읽다가 영감을 얻어서 ‘막벨라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교회 건축 프로젝트였다. 아브라함이 낯선 가나안 땅에 가서 우여곡절 끝에 겨우 얻는 땅이 막벨라였다. 그처럼, 우리도 땅을 구입하여 그곳에 교회를 세우자는 의견을 모아, 교회 건축 프로젝트의 이름을 ‘막벨라 프로젝트’로 정하여 진행한 적이 있다. 그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2년만에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추억이 아득하다.

 

3.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다. 사라는 아브라함보다 10살 어렸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가족이 하란을 떠날 때 사라는 65세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떠나라고 지시하시고, 그곳에서 ‘땅과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 약속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나안에 아브라함을 위한 땅이 준비된 것도 아니었고, 사라의 태가 활짝 열려 있어서 자식을 금방 낳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4.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가나안 땅으로 가서, 그곳에서 땅과 자손의 약속이 성취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자식의 약속이 먼저 성취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나이는 100세이다. 그러니까, 자식의 약속을 받은 뒤 25년 후에 약속의 성취가 이뤄진다.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는 더 오래 걸렸다. 사라가 127세에 죽었으니까,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였고, 하란을 떠날 당시의 나이는 75세였으므로,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는 6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5.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income mobility across generations(세대 간 부의 이동)’ 통계를 2018년도에 발표했다. 나라마다 저소득층(하위 10%)이 중산층으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 OECD 국가의 평균은 4.5세대이고, 가장 빠르게 이동하는 국가는 덴마크로 2세대 만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가장 느리게 이동하는 국가는 콜롬비아로 11세대가 걸린다. 한국은 5세대가 걸린다는 통계가 나왔다. 가난은 대물림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고, 새로운 인생,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6.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 쉽지 않다. 하나님께 약속을 받아 부푼 꿈을 안고 가나안 땅에 왔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나안 땅에 오자마자 기근이 닥쳐 애굽으로 몸을 피해야 했고, 그곳에서 하마터면 아내 사라를 잃을 뻔했다. 조카 롯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약속 문제로 가정불화를 겪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자식이 하도 들어서지 않으니까, 아내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어 보려 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그 일로 가정이 깨질 뻔했다.

 

7.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 인생의 클라이맥스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는 이 사건을 아주 세밀하게 다루기도 한다.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로, 문자의 형태로 이삭 사건을 접해서 그렇지,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사건이 실제 내 삶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재구성을 해보면, 가족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가져다줄 만한 엄청난 사건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약속의 성취로 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도 이해가 안 가고, 바치라고 했다고 아들을 바치는 아버지도 이해가 안 가는 사건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기에 충분한 사건이고, 이삭과 아내 사라는 아버지와 남편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8. 그리고 얼마 후, 아브라함에게 큰 슬픔이 찾아왔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은 것이다. 사라의 죽음은 아브라함 가족에게 큰 시련이었다. 이삭은 엄마의 죽음 때문에 방황했다. 나중에 나오지만, 이삭이 방황을 멈추게 된 것은 아내 리브가를 얻으면서였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 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 24:67). 남편 아브라함의 슬픔은 창세기 23장에 이렇게 표출되어 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해 했다”(창 23:2). 아브라함 가족은 트라우마와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다. 아브라함의 삶은 쉽지 않았다.

 

9. 아브라함의 녹록지 않은 인생 여정은 아내 사라가 죽은 후에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내가 죽었다. 그런데 아내를 묻을 땅이 없었다. 땅에 대한 약속을 일곱 번이나 받았는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그녀를 묻을 땅이 없었다. 이게, 보통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땅에 대한 약속을 일곱 번이나 해주셨는데, 결국 아브라함에게는 죽은 아내를 묻을 땅 한 켠조차 없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신세 한 탄 하면서 골방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며 하나님을 욕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그렇게 인생을 마감할 만한 상황이다.

 

10.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앙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에서 자기의 인생을 후퇴시키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2-4).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사건을 통해서 주저 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두 가지다. 하나는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묻을 땅을 사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엄마를 잃고 슬퍼하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의 배필을 찾는 일이었다.

 

11. 근대 세계사에서 가장 참혹한 일로 기록된,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홀로코스트 사건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눈물 겹다. 홀로코스트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들을 태워서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의 제의적 용어를 고유명사로 변경하여, 현재 인류 역사는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 대한 연구를 실행했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그러한 끔찍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트라우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가 였다.

 

12. 그 중에, 유대인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그들 대부분은 과거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혼인한 배우자들에게도, 또한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창조했다. 그들은 그곳의 언어와 관습을 새로 배웠다. 직업을 찾았고, 경력을 쌓았다. 혼인해서 아이들을 낳았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았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선 그들은 미래를 건설했다”(조너선 색스, <매주 오경읽기 강론>, 57-58쪽).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미래를 열어갔던 사람들에서 보이는 이러한 행동 유형은 구약의 예언서에서도 강조되는 것들이다.

 

13. 바벨론 포로기 시절, 이스라엘이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경험하며 민족적 트라우마에 걸려서 방황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는 그 깊은 집단 트라우마의 늪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 위대한 선지자들의 처방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행한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곳(바벨론)에서 번성하라는 것이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렘 29:4-6).

 

14.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생명력을 소멸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명력을 소멸시키는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마다 구체적인 경험은 다르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생명력을 소멸시키는 일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때, 우리에게 신앙은 어떠한 의미인가? 반드시 물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믿음의 아버지인 이유는 그가 트라우마와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러한 것 때문에 생명력을 소멸시키고 주저 앉은 것이 아니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하여 행동했다는 것이다.

 

15. 아브라함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가나안 땅의 원주민 헷족속에게서 땅을 샀다. 그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헷족속과 지난한 거래를 한 끝에 가나안에서 드디어 땅을 얻었다. 땅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아브라함은 엄마를 잃고 상심에 젖어 있는 아들을 위해서 아들의 배필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몸종을 먼 곳에 보내는 모험을 감행한다. 자신이 떠나왔던 하란 땅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의 배필, 리브가를 데리고 온다. 자손에 대한 약속이 또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미래를 열어갔다. 그렇게 그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아버지가 되었다.

 

16.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신앙은 미래를 열어준다. 가난하던 사람이 가난을 벗어나 풍요를 누리게 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사람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슬픔에 휩싸여 꼼짝 못하던 사람이 그 슬픔을 이겨내고 미래를 열어간다. 의미 없던 인생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팔다리에 힘을 얻는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주님, 저에게 미래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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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