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26. 09:38

이삭처럼 사랑하기

(창세기 25:19-28)

 

1. 창세기는 족장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크게 네 명의 족장이 등장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이 족장들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뭘까? ‘파란만장’이 아닐까, 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표현해 주는 대표적인 말은 야곱이 요셉의 배려로 애굽 땅에 도착하여 애굽의 바로(파라오)와 주고받는 대화 속에 나타난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difficult/hard)을 보내었나이다”(창 47:8-9).

 

2. ‘파란만장’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족장들의 삶을 평가해 볼 때, 어느 족장도 파란만장 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은 족장은 없다. 그래도 순위를 매겨 보라고 하면, 요셉이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 다음이 야곱이고, 세 번째가 아브라함이고, 마지막으로 이삭이 위치하는 것 같다. 창세기에 기록된 이삭의 삶을 보면 다른 족장들에 비해 평탄한 데가 있다. 이삭의 죽음을 기록한 부분을 보아도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창 35:28-29).

 

3. 이삭은 다른 족장들에 비해 튀는 데가 없다. 그의 성품은 온유하고, 우직하다. 나는 이런 성품이 마음에 들어 나의 둘째 아들에게 ‘이삭’(Isaac)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국어 이름은 ‘찬유’. ‘찬’자는 빛날 ‘찬’자인데, 원래는 ‘불 화 변’을 쓰는 빛날 ‘찬’자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불화 변 대신 ‘구슬 옥 변’을 쓰는 ‘찬’ 자를 선택했다. 불 같은 온유가 아니라 옥 같은 온유를 이삭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구슬처럼 은은하고 수수하게 빛나는 온유함을 지닌 사람, 이삭이 그렇다. 그래서 그러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이삭/찬유’라고 지어주었다.

 

4. 그러나 나는 창세기의 이삭 이야기를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삭이 끝까지 에서를 사랑하고 에서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려는 시도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장자권은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가야 하는 것인데, 왜 이삭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축복하면서 야곱이 아닌 에서에게 축복을 하고자 했던 것일까. 나는 이 부분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이삭이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쌍둥이 아들, 에서와 이삭의 출산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25장을 보면, 에서와 야곱이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다툼이 너무 심해서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는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이 상황을 하나님께 묻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

 

5.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면,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어떻게든 이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즉,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죽을 때 야곱을 불러 축복을 하고, 그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도록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삭의 이야기를 보면, 이삭은 결코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삭은 한결같이 생물학적 장자 에서를 가장 사랑했고, 마지막 축복을 해줄 때도 야곱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에서에게만 축복해 주기를 원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가?

 

6. 창세기 25장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고, 이제 이삭이 혼자의 힘으로 가족들을 건사하며 인생을 꾸려 나가야 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25장에는 세 개의 족보가 나온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족보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에게서 낳은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의 족보이다. 이스마엘은 다른 족보를 가진 다른 민족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셋 번째 족보는 이삭의 족보이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족보를 잇는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1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형 이스마엘은 137세에 세상을 떠난다. 이스마엘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만, 이삭의 삶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7. 부모가 죽고 나면, 자신 만의 삶의 원리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이삭의 삶의 원리는 무엇이었을까? 자식은 부모를 본받기도 하지만, 부모를 반면교사 삼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반면교사 삼았던 것 같다. 여기에는 이삭의 독특한 경험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삭이 살면서 자신 만이 경험한 사건, 즉 이삭이 다른 족장들(아브라함, 야곱, 요셉)과 다른 삶을 살게 한 그만의 독특한 인생 경험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스마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모리아 산 제물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이삭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각인된 사건이다.

 

8. 이스마엘 사건은 어린 이삭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른들이 왜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상황은 이렇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창 21:9-10).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우여곡절 끝에 아브라함은 이삭의 배다른 형(그런 개념이 없었을 것)을 내쫓는다. 이 일로 이스마엘과 하갈은 광야에서 거의 죽을 뻔한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아니었으면, 아브라함에게 내쫓긴 이스마엘과 하갈은 광야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 후에, 이삭에게 또다른 시련이 닥친다.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으로 가자고 하더니, 그곳에서 자신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삭에게 정말 평생의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9.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로 쫓아낸 이유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도, 모두 ‘언약’ 때문이었다. 이삭은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언약이 뭐길래?!” 그런데, 이삭이 쌍둥이 아들을 낳고 보니, 이들 가운데도 ‘언약’의 말씀이 주어진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버지처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에서를 광야로 내쳐야 하는가? 이삭은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나는 결코 언약 때문에 자식을 사지로 내모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끝까지 큰 아들 에서를 지킬 거야. 사랑할 거야.” 이삭은 사랑하기로 결단한 사람처럼 보인다.

 

10.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삭을 ‘믿음이라는 잣대로’ 판단하기 쉽다. 언약을 내팽개친 이삭을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삭은 언약을 내팽개치고 인간적인 마음으로 장남 에서를 사랑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삭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렇게 믿음 없는 사람이 어떻게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처럼 족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가? 어떻게 이러한 사람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삭의 ‘믿음 없음’에 실망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언약을 어기고, 끝까지 에서를 감싸고 도는 이삭은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언약을 마음에 두고 야곱을 사랑한 엄마 리브가보다 이삭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11. 나는 유대인 랍비가 쓴 책을 보다가, 이러한 고민을 한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뻤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민이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때 기쁘다. 유대인 랍비들도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이런 저런 해석을 내놓았다. 성경은 등장인물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삭이 마지막으로 에서에게 축복했을 때, 자신의 축복을 받은 아들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이삭은 분노를 표출한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었다”(창 27:33). 그리고 에서는 자신의 축복을 가로챈 동생 야곱을 향해 살기를 품는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창 27:41).

 

12. 이삭은 왜 그토록 에서를 사랑했을까? 어떤 사람은 에서가 “날랜 사냥꾼”이었다는 말로부터 에서가 덫을 놓아 이삭을 속였다고 말한다. 에서는 실제보다 훨씬 경건하고 종교적인 척, 하나님을 잘 믿는 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에게 속아 에서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것은 에서가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버지들의 모습이다”(매주 오경 읽기, 64쪽). 그러면서 이삭이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은 이삭이 경험한 아버지와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는다. 즉, 이삭이 에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 자신을 죽이려 한 사건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이다.

 

13.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족장들 중에서 가장 평탄한 삶을 산 것 같고, 가장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무난한 삶을 산 것 같은 이삭이 사실은 가장 힘든 삶을 살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아버지(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삭은 그렇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형 이스마엘, 즉 아브라함의 큰 아들을 죽음에 내몰았다. 이스마엘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하는 트라우마 속에서 평생 살았을 것이다. 그 사건을 보면서 이삭도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나도 버리면 어떡하지? 그런데 실제로 그와 비슷한 일이, 아니 더 큰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가 자기 자신을 죽이려 든 것이다.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이삭은 정말 죽다 살았다. 이것은 아버지를 향한 이삭(아들)의 마음을 차갑게 하기에 충분했다.

 

14. 이삭의 경험은 아주 원초적이다. 이삭의 경험은 사는 데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존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일이다. 이삭은 아버지와 ‘단절’을 경험했다. 그 단절의 경험이 이삭을 평생 괴롭혔다. 야곱은 하란 땅으로 떠나는 물리적 단절을 경험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는 물리적 단절을 경험했다. 야곱과 요셉은 다행히도 아버지(부모)와의 단절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삭은 야곱과 요셉처럼 물리적 단절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단절의 경험, 아버지와의 단절을 경험했다. 그래서 이삭은 그 누구보다도 더 힘든 삶을 살았다.

 

15. 이삭이 이유불문하고 에서를 덮어놓고 사랑한 것은 “이삭 자신이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결박당했던 사건이 초래했던 부자간의 관계 단절을 치유하는 일이었다”(조너선 색스)는 진술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던 이삭이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이삭 이야기를 보면, 에서가 그렇게 훌륭한 아들은 아니다. 아버지 이삭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준 것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이었다. 특별히 결혼 일로 에서는 부모의 속을 정말 많이 썩였다. 그러나, 이삭은 이유불문하고 에서를 끝까지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다.

 

16.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삭의 상처를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에서의 상처도 치유한다. 이삭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에서는 동생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한다. 이삭은 평화롭게 죽었고, 에서는 나중에 동생 야곱이 하란 땅에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죽이고 싶었던 동생’ 야곱과 화해한다. 에서가 동생 야곱에 대하여 마음을 푼 것은 아버지 이삭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상처를 치유한다. 사랑은 구원이다.

 

17.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인생이었지만, 믿음의 조상 반열에 당당히 들어선 이삭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교훈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거 하나 만으로도 다른 족장들이 보여주는 삶의 교훈보다 더 크고 값지다. 사랑은 결단이다. 밖에서 오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안에서 솟구치는 능동적 감정이다. 주변여건사정을 판단해서 사랑을 줄만 하면 사랑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주지 않는 수동적 마음의 작용이 아니다. 사랑은 결단이다. 주변여건사정에 상관없이,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이삭은 그렇게 에서를 사랑했다. 언약을 신경 쓰지 않았고, 에서의 행동에 실망해서 마음을 접지 않았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기로 결단했다. 그것이 이삭이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었고, 에서를 구원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도 이삭처럼 사랑하면 좋겠다. 자식을, 가정을, 교회를,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면 그 무엇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그 사랑이 나와 모두를 구원할 것이다. 사랑은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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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