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11. 06:27

예의

(창세기 37:12-36)

 

1.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에 온지 딱 20년만이다. 살면서 미국 시민권 취득을 취득해야겠다는 갈망을 가진 적은 없다. 그런데, 살다 보니 미국 시민권이 내게로 왔다. 미국 시민권 취득을 계기로, 어떻게 하다 나는 미국에 왔으며, 이렇게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는지,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미국에 대한 좋은 마음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초등학교/중학교 시절(1980년대),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가 변변치 못했다. 그때 TV에서는 주로 미국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아버지는 나와 함께 미국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하셨다. 함께 ‘A특공대’(The A Team)도 보고, ‘전격 제트 작전’(The Knight Rider)도 보았다. 그리고 ‘V’라는 SF 드라마도 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미국 드라마들이다. 서부 영화도 즐겨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 이름은 튜니티’였다. 나중에 미국 와서 찾아보니 이 드라마의 영어 타이틀은 ‘My name is Trinity’였다.

 

2. 아버지는 나에게 미국 유학의 꿈을 키워 주셨다. 아버지는 목원대에서 신학공부를 하셨는데, 그 당시 아버지의 은사들 중 에모리대학교 출신이 몇 분 계셨다. 대학을 진학할 때쯤 아버지는 종종 미국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특별히 내가 에모리대학교로 유학을 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다닐 당시 주미대사가 에모리대학교 총장 출신인 제임스 레이니였다. 이 분 이야기를 하시면서 에모리대학교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에모리대학교 유학을 꿈꾸웠다. 아버지는 내가 미국으로, 그것도 에모리대학교로 유학 나오는 것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나는 이렇게 미국에서 유학도 하고 자리잡고 살고 있다. 게다가 생각도 못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3.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은 이렇게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 같다. 나의 경우에 아버지의 친절한 행동이 나의 인생을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그런 삶의 이야기가 참 궁금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친절한 행동.’ 우리는 이것을 ‘예의’라고 부른다. ‘예의 있게 행동하다’, 또는 ‘예의를 갖춰 행동하다’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친절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다. 영어로 예의는 ‘civility’이다. ‘Civil’은 시민이라는 뜻이다. 또한 ‘예의 바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Civilization은 ‘문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민이 된다. 문명인이 된다는 뜻은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사는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예의 있게 행동하는 사람’, 즉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문명이란, 그런 사람들이 이룬 사회를 뜻한다.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인 사람, 문명 = 야만인/야만문명)

 

4. 창세기 37장은 네 번째 족장 요셉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 시작이 참으로 비참하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문제의 발단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서 시작된다. 야곱은 슬하의 12명의 아들들 중 요셉을 가장 사랑했다. 야곱이 요셉을 가장 사랑한 이유는 그가 요셉을 노년에 얻었고, 또한 자기가 가장 사랑한 부인 라헬의 첫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어찌하다 보니 야곱은 네 명의 부인을 두게 되었지만, 자신이 진짜 마음으로 사모하고 원했던 부인은 라헬이었다. 야곱이 네 명의 부인을 맞이하게 된 것은 라헬을 부인으로 얻기 위한 노력 중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긴 일이다.

 

5.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친절했다. 야곱은 요셉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 아들 요셉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그러한 마음은 요셉이 입고 다녔던 채색옷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요셉의 동생 베냐민은 너무 어린 아이라 제외하고, 요셉의 형 10명은 채색옷을 입지 못했다.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는 다른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낳았다. 요셉 이야기의 발단은 두 가지의 감정이 교차해서 발견된다. 사랑과 미움. 사랑의 마음도 강렬하고, 미움의 마음도 강렬하다. 이 두 마음이 아주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다. 무슨 일이 발생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6. 어느 날, 요셉의 형들은 양 떼를 몰고 집을 멀리 떠나 양 떼를 먹이러 갔다.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 안부를 전하고 그들에게서 안부를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요셉이 자신들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을 본 형들은 미움의 마음을 표출할 기회를 얻는다. 미움의 끝은 죽음(폭력)이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때 형제들을 반기를 들고 나온 형제가 있었다. 르우벤이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다. 르우벤이 왜 요셉을 죽이려는 계획에 반기를 들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르우벤의 친절한 행동은 요셉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르우벤의 계획은 이랬다. 일단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대지 않고 살려 둔 틈을 타서, 자신이 다른 형제들 몰래 구덩이로 돌아와 요셉을 구출하여 아버지에게로 되돌려 보내려 했다.

 

7. 르우벤의 계획이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이스마엘(에돔) 무역상이 애굽으로 장사를 하러 가던 것이 형제들 눈에 들어왔다. 이때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나서, 요셉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는 일까지는 하지 말고, 요셉을 그 무역상들에게 노예로 팔아 애굽으로 데리고 가도록 했다.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은 유다의 계획대로 진행됐다. 그 사실을 몰랐던 르우벤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구덩이로 돌아왔으나, 요셉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르우벤은 당황하여 옷을 찢고 분노하고 슬퍼한다. 장자로서, 아버지 야곱에게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요셉에게 발생한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들은 사실은 숨기고,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발라 아버지 야곱에게 가지고 갔고, 야곱은 사랑하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 먹혀 죽은 줄 알고, 심히 슬퍼했다. 정말 마음 아픈 장면이다.

 

8.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이것이 야곱의 가정 불화를 통해서 발생할 거라는 것을 야곱과 그의 자녀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을 통해 인생이 바뀌기도 하고, 누군가의 친절하지 않은 행동을 통해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나의 행동이다. 나의 행동은 어떠한가.

 

9. 성경에 보면, 누군가의 예의, 친절한 행동을 통해 인생이 바뀌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다윗이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다윗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의 왕이었지만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 덕분이었다. 요나단의 예의, 친절한 행동 덕분에 다윗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울 왕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다. 이러한 예의, 친절한 행동은 다윗에게 전달이 되고, 다윗은 요나단처럼 친절한 행동을 이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뒤 다윗은 요나단의 후사를 돌본다. 사무엘하 9장에 보면 그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는데,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거두어 재산을 물려주고 왕자들과 똑 같은 대접을 한다.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절었다. 패망한 왕가의 자손이고 장애를 가진 자로서 비참한 인생을 살다 죽을 운명에 처해있었지만, 므비보셋은 다윗의 친절한 행동 덕분에 인생이 바뀐 대표적인 인물이다. (따뜻한 이야기)

 

10. 우리는 ‘예의’라는 말을 들으면 동양적인 사고를 한다. ‘예의’라는 말을 들으면 공자와 맹자를 떠올린다. 그래서 예의라는 말을 고리타분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웬 ‘예의’? 공자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지만 성경에서의 예의는 공자님과 맹자님이 말씀하신 것과 결이 좀 다르다. 성경에서 예의는 헤세드를 뜻한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하신다. 즉, 친절한 행동을 하신다. 하나님의 친절한 행동이 우리를 살린다. 그리스도인이 예의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알고 증거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11.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그만큼 우리의 행동은 무겁고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헤세드와 같이 친절한 행동, 즉, 구원을 가져오는 행동이 되게 끔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은 단순히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행동에만 머물면 안 된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입은 행동이 되도록 우리의 행동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행동이어야 한다. 행동 하나 하나에 믿음을 담아서 하는 행동, 행동 하나 하나에 기도를 담아서 하는 행동, 그것을 ‘예의’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친절한 행동이고, 하나님의 헤세드가 역사하는 구원의 행동이다.

 

12. 미국 시민이 된다는 것은 미국의 문명이 담고 있는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며 그 가치를 실현하면서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해진 하나님 나라의 문명(civilization)이 담고 있는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며 그 가치를 실현하면서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그 가치는 헤세드, ‘예의’에 담겨 있다. 친절한 행동. 구원하는 행동. 생명을 살리는 행동.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행동.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친절한 행동, 예의, 헤세드를 통해서 구원 받았다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친절한 행동, 예의, 헤세드를 구현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13.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자. 지금 나의 행동은 친절한 행동인가. 헤세드인가. 예의인가. 나의 행동이 친절한 행동으로서,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고 있는가. 순간순간 행동할 때마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지 말고, 그 행동에 믿음을 담아서, 그 행동에 기도를 담아서 행동하라. 나의 행동이 예의가 되게 하라. 친절한 행동을 하라. 구원이 샘솟는 헤세드의 행동이 되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누리는 권세이자 행복이다. “예의 있게 행동합시다!” “친절한 행동을 합시다!” 예의를 통해서 우리 모두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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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