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5. 7. 02:16

아들에게 들려주는 히브리서 이야기 1

 

아들아, 이제부터 아버지가 네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눈과 귀를 아버지가 하는 말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너의 온 존재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10:17)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시면 우리는 들을 수 없고, 결국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이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께 온 존재를 다하여 반응하는 것이란다. 아들아, 이제부터 아버지가 네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온 존재를 걸어 들어야 하는 믿음의 행위란다.

 

히브리서를 누가 썼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을 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누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란다. 왜냐하면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서신을 누가 쓴 것인지 밝히지 않고 있단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말씀이 단순히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은연중 보여주고 있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말씀이다. 그러니 온 존재를 걸어 들어라!’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란다.

 

이 히브리서의 수신자를 보통 히브리서 공동체라고 부른단다. 히브리서에서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꼭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단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지. 이 서신을 받아본 히브리서 공동체는 로마에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몇 가지의 상황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첫째로,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이들은 당황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모든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 문제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단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 중에 얼마나 빨리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으로 얘기하신 것도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16:28). 이 말씀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 둘씩 죽어가는 상황에서 초대교회 공동체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이러한 심란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초대교회 지도자들, 특별히 사도들은 무단히 애를 썼단다. 이런 말씀으로 위로한 구절도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사실 이 상황, 즉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상황은 예수님의 승천 사건이 있은 후 2000년이 훨씬 지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00년이란 세월 동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은 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아예 재림 불감증이 걸린 상태에서 살아가기 때문이지. 예수님께서는 안 오시는 것도 아니고 더디 오시는 것도 아니고, 지금 오고 계신단다. 예수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이란다. 엘리야 선지자가 손바닥 만한 구름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비구름이 몰려 오는 것을 알아채서 준비 했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고 계신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란다.

둘째로, 히브리서 공동체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이유는 박해와 핍박이었다. 박해란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학대 받는 것을 가리키는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 공동체에 학대 받는 상황이 그것이었단다. 이를 잘못 오해하면, ‘유대교가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단순 논리에 빠지기 쉽다. 그렇게 되면 히틀러가 저질렀던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는 것이지. 이 상황은 절대 그런 상황이 아니란다. 유대교가 기독교를 핍박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대교의 핵심 원리가 기독교의 핵심 원리를 잠식해 들어갔다는 뜻이다. 유대교의 핵심 원리는 율법이다. 기독교의 핵심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율법은 자기 의이고, 십자가는 은혜인데, 이 둘이 서로 충돌했다는 뜻이다. 율법과 십자가의 관계를 집요하게 분석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란다. 그의 서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이 두 원리(율법과 십자가(복음))를 파헤친 깊은 신학적 논증이라고 할 수 있지. 율법과 십자가의 충돌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란다. 이것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와 그 길을 같이 걸어온 문제야. 아마도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끝나지 않을 논쟁이 될 것이다. 물론 성경을 통해서 이미 십자가의 은혜가 율법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 이 둘은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가려내기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란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끝난 문제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아직 헷갈리는 문제라는 뜻이다. 아직까지도 기독교인들 중에는 십자가의 은혜로 살지 못하고, 율법의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자기 의’,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의로운 존재가 되려는 마음이 바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기 때문이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늘 조심해야 한다. ‘날마다 죽지않으면 은혜가 아닌 자기 의로 살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쨌든 히브리서 공동체는 지금 십자가의 은혜로 살기를 포기하고 율법의 자기 의로 살아가던 때로 되돌아 가려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처음 믿은 바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서신이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다시 집중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정신이 흐트러지면 혼란을 겪게 마련이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듭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깨어라는 말은 정신 차리라는 뜻이란다. 한문으로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말을 할 때의 상태이고, 속담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란 말에서 느껴지는 정신 차림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정신을 엉뚱한 데 팔게 한다. 초점을 흐트러뜨리고 목표를 교란시킨다. 결국 중간에서 포기하게 만든다. 그게 이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지금 히브리서 공동체에게 이런 세상에서 정신 차리고 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 차려서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이다. 아들아, 히브리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도 이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정신 못 차리면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칠 수 있음’( 3:3)을 유념하거라. 이것은 곧 재앙이요, 죽음이다. 이 사망의 위협에서 우리를 건져주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말씀이란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