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2. 25. 02:33

하나님은 안식이시다 레위기 25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일컬어 절대타자라고 부른다. 이렇게 절대 타자인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레위기 25장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안식이다.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규례를 담고 있다. 그리고 희년 정신에 근거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공정하고 은혜롭게 자비를 베풀 것을 명령하는 규례도 더불어 담고 있다. ‘규례이기 때문에 딱딱하게 다가올지 모르지만, 사실 이만큼 따뜻한 규례도 없다. ‘안식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이 가장 눈 여겨 보아야 할 말씀 중 하나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규례는 단순하다. 안식일의 규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 규모만 다를 뿐이다. 안식년은 6년 동안 일하고, 일곱 번째 되는 해에는 일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초점이 인간에게 맞추어져 있지 않고, ‘에 맞추어져 있다. 6년 동안 경작하고, 일곱 번째 되는 해에는 경작하지 못하도록 한 규례가 안식년 규례이다. 그러니까 안식은 기본적으로 땅의 안식을 의미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천지창조의 이야기 이후에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로 여겨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6, 그리고 6년을 주시고, 7일과 제 7년은 당신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하신다.

 

이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일곱 번째 해에 땅을 경작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식년 규례는 이것을 가르쳐 준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요즘처럼 땅이 황폐화 되고, 육체가 황폐화 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생명처럼 되새겨야 한다.

 

기본적으로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땅이 상하도록 경작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인 동시에 몸이 상하도록 일하면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땅의 경작을 쉬면서 그 땅을 경작하던 인간도 덩달아 쉬게 되는 것이다. 이는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뜻과 무관하다. 이는 베짱이처럼 빈둥빈둥 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도 안 되는 오해와 무관하다. 이는 인간의 내면적, 그리고 외면적 삶의 태도와 관련되는 매우 심오한 규례이다.

 

우리가 왜 땅을 상하도록 경작하고, 몸이 상하도록 일하게 되는가? 기본적으로 욕심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이든지 분에 넘치도록 가지려 한다. 이 세상의 삶의 법칙이 그렇다. 소유와 소비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통하여 땅과 몸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소유와 소비의 극대화 이면에는 땅과 몸의 황폐화가 따라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땅과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게 하는 것은 검소하게 살고 욕심부리며 살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청빈의 삶이 곧 안식을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이다.

 

청빈의 삶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만이 아니다. 청빈의 삶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안식을 체험하기 위한 영성의 길이다. 땅과 몸을 안식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소유와 소비를 극소화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청빈인 것이다. 땅이 안식을 누리게 되면 땅의 생명력이 되살아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몸이 안식을 누리면 생명력이 되살아나 영안이 열린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으로 당신의 존재를 계시하신다. 우리가 안식한다는 것, 즉 쉼을 얻는다는 것은 몸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경험하는 최고의 순간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다. 안식일에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안식년에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희년에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다. 쉬는 동안 하나님을 만난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께서 삶의 기본적인 필요를 놀라운 방식으로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경험했다.

 

현대인들에게 쉬는 문제는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현대인들은 쉬는 동안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소비자가 될 뿐이다. 쉬면서 생명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러했듯이 또 다른 소비에 물들 뿐이다. 현대인들은 안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저 이 세상이 이끄는 데로, 소비의 멍에를 짊어진 황소처럼 끌려 다니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레위기서 25장은 구원의 밧줄이 되어 준다. 소비의 멍에를 끊어주는 복음이 되어 준다.

 

하나님은 안식이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안식은 신앙의 문제이다. 쉬는 것도 신앙이다. 물론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무작정 쉴 수는 없다.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땅과 몸이 상하지 않도록 각자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을 꼭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의 신앙의 분량만큼 깨달아지고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신앙의 분량만큼 안식을 삶 속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각자의 삶 가운데 안식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만큼 넘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