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1. 14. 01:03

레위기 13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

 

레위기 13장에 나타난 레위기서 저자의 관심은 무엇일까? 이는 분명 의학지식을 전달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현대 의학의 지식과 상당부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레위기는 의학 매뉴얼이 아니다. 오히려 성결(거룩) 매뉴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레위기의 관심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 우리는 레위기를 읽으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레위기에서 구분하고 있는 정함과 부정함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레위기에서 구분하고 있는 정함과 부정함은 철저하게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구분이다. 영어로 “ceremonially”의 정함과 부정함의 구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의 정함과 부정함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의 질문에 대한 답은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다음의 답이 따라온다.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러한 질문이 올 수밖에 없다. “어떠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인가?” 레위기는 바로 이것에 대한 대답이다. 그래서 레위기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사람인지를 세세하게 구분해 놓고 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상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은 이렇게 율법으로 정해졌다.

 

특별히 레위기 13장은 나병에 대한 구별법과 정함과 부정함을 구분하고 있지만, 이는 나병에 대한 의학상식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숙지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레위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나병의 단어 차라아트는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그 나병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레위기에서 쓰이고 있는 차라아트는 전염성 피부병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일 뿐이며, 우리 성경이 그것을 나병이라고 번역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그 나병은 주후 6세기부터 나타난 병이라고 한다.

 

나병이라고 번역된 전염성 피부병이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이스라엘은 이렇게 거룩함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하나님께서 온전하시니 자신들도 온전해야 한다는 신앙에서 비롯된 관심이다. 또한 이런 식으로 공동체를 보호했다. 전염성이 있는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진영 안에 머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전염성이 있는 병을 가진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곤란에 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변변한 의학상식과 치료기술이 없었던 고대사회에서는 공동체의 공중위생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처였다. 대단히 지혜로운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도 심심치 않게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무슨 옷을 입고 교회에 와야 하는가, 또는 머리에 물감 들인 사람이 교회에 와서 예배 드려도 되는가, 등의 문제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이 정장 바지를 입고 교회 출입을 하는 것을 나무라는 교회가 있었다. 여성은 꼭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또한 모자를 쓰거나 머리에 염색을 했거나, 행색이 불순한 사람은 교회에 드나드는 것에 눈총을 받았다. 이러한 것이 바로 레위기에서 말하는 정함과 부정함이다. 여성이 치마를 입지 않았거나, 누군가 머리에 모자를 썼거나 머리에 염색을 했을 때,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됐다. 그러고 보면 레위기의 정함과 부정함이 꽤 거창해 보이는 것 같아도, 실상은 별거 아닌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레위기의 정함과 부정함은 도덕적인 정함과 부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제의적인 것(ceremonially)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제의적으로(ceremonially)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하나님께 받게 되는 죄사함이나 축복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죄사함을 받는 길, 그리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길은 성막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 드릴 때였다. 그러므로 제의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하는 부정함을 지닌 사람은 매우 큰 곤란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함과 부정함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율법으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교회 안에서 정함과 부정함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무슨 옷을 입고 와야 하느냐, 행색이 어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티격태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논쟁인지 알게 된다.

 

이것부터 확실하게 말해 두는 것이 좋겠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정함과 부정함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라는 질문이 필요 없어진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여기서 오해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구원 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더라도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겠지만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과 그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은 분명 다른 차원의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이것을 선행은총으로 표현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인데, 레위기의 언어를 빌려 다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정함과 부정함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교리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요즘처럼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때에는 더욱 그렇다.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게이나 레즈비언이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정죄하면서 그들을 막아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선행은총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무신 담을 왜 교회는 다시 쌓으려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 열린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 길이 열렸다고, 그 길로 나아가라고 외치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는 충분히 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배타적인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할 입장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열린 길을 막아서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참으로 부질 없는 질문이다. 모든 이들이,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주인이나 종이나, 부자나 거지나, 피부색깔에 상관 없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상관 없이, 머리에 염색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상관 없이, 성적 소수자들일지라도,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하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