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5. 00:30

골로새서

4. ‘
이제의 시대에 속한 성도들 (1:21-23)

          
21
절은 짧은 구절이지만 여기에는 우리의 과거가 다 들어 있다. 하지만 이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새사람이 된 현재 상태에서 바라본 과거의 모습이다. 이게 아니고서는 우리의 과거에서 감사를 건져낼 수 없다.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던존재였다. 이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와 같은 상황이다. 우리는 탕자처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난 탕자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것처럼 우리의 행실도 바르지 못했다. 악한 행실로 인해 멀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악한 행실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나의 존재를 표현한다. 우리의 존재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존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고 이 원수된 마음 속에서는 악한 행실이 표출된다
. 인류의 역사를 보라. 얼마나 비열하고 처참한 일들이 많이 자행되었는가를! 지난 2차 세계 대전 중에 자행되었던 유태인 대학살 사건을 보더라도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아우슈비츠사건 이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나님은 멀리 있는, 우리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존재로까지 여겨졌다. 하나님이 안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우리 인간의 마음은 악한 행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성도들의 이전 모습, 과거이다.

          
그러나 22절에서 그러나 이제라는 말로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시대를 일컫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신 화해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다 준 사건을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천동설을 믿었던 고대인들에게 코페르니쿠스가 천명한 지동설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혁명 정도가 아니다. 혁명은 원래 존재하고 있었던 진리를 새롭게 발견한 것에 불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새로운 진리, 즉 새로운 창조이다. 패러다임은 또 다른 패러다임에 의해 파기될 수 있고 혁명은 다른 혁명에 의해 뒤집어 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어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리, 절대적인 진리, 새로운 창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룬 하나님과의 화해는 은혜의 사건이다
. 우리 인간의 어떠한 전제나 조건과는 상관 없이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사건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사건이라고 해서 이 은혜를 받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 은혜는 은혜 받는 사람을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주체로 만든다. 은혜 받은 사람이 책임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은 거룩함, ‘흠 없음’, 그리고 책망할 것이 없는삶으로 나타난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제물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인데, 하나님과 화해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시대인 이제에 속한 성도들은 은혜 받고 뒤돌아 입씻는 파렴치한이 아니라, 은혜에 책임적으로 행동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