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0. 02:23

골로새서

3.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권자이시다 (1:15-20)

           15절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와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우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기서 로고스 기독론이 나온다. 필로에 의하면 로고스를 처음 태어난 자로 불렀고, 이 로고스가 세상을 창조하는 데 중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세상은 로고스의 형상이다. 유대교의 지혜 문헌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플라톤적 사고와 구약성서적 사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와 지혜로 불려질 수 있게 되었다. , 그리스도가 로고스요, 지혜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하는 데 중재역할을 했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가 장자권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장자권을 갖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이 강조된다. 그런데 이 표현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장자권, 즉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말은 곧 그리스도도 피조물이라는 의미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교회 사에서 그 유명한 아리우스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약간 못한 존재로 표현한다. 이 논쟁으로 인해 탄생한 그리스도에 관한 단어가 호모 우시우스(동일본질론)’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고, 그리스도의 장자권은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이해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문제가 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냐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이 처음부터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에게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고백이 탄생할 수 있었던 절대적인 이유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체험한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 사건을 체험하고 나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 부활의 체험에서부터 거슬러 예수가 누구인지를 인식했다는 말이다. 부활체험이 없었다면, 예수에 대한 이러한 신앙고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기독교의 존재 근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거나 그의 삶 속에서 체험되어지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의 기반은 약할 수밖에 없다. 부활이란 종말의 사건을 이야기 하는 건데, 종말의 시간이 현재로 들어온 혁명적인 사건, 새창조의 사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종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이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활이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서 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1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피조물의 관계를 더욱 상세하게 설명한다. 왜 그리스도는 창조 세계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여기서 안에서라는 말은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째 장소적인 의미, 둘째 도구적인 의미, 셋째, 관계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문맥상 가장 어울리는 의미는 세 번째, 관계적인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교제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근거가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내적으로 이러한 교제를 이루시고, 그러한 교제가 일구어낸 것이 바로 창조이다. 이 창조는 경륜적 삼위일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구절에서 창조되었다단어는 두 번 등장하는데, 각각 단순과거형과 완료형으로 쓰였다. 여기서 좀 더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이 완료형으로 쓰인 창조되었다라는 단어이다. 언어에서 완료형이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 과거에 한 번 있었던 창조의 사역이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의 완료형이 여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는 태초에 창조된 만물이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으로도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17절에서 이것에 대한 내용이 반복되고 요약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창조 세계는 질서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모든 만물이, 이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골로새 교회가 이단 사상에 공격 당하고 있었던 부분이 이러한 것이었다. 창조 세계의 질서와 생명이 그리스도 외에 다른 영적인 존재들에 의해서도 유지된다는 이단 사상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퀴리오스(주님)이시라는 고백을 무색케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이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영적존재들은 모두 피조물에 불과하다. 이는 그들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숭배의 대상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숭배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인 세력을 무서워해야 할, 그리고 경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세상의 질서와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 같은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나를 숭배하지 않으면 멸망 당할 거라고! 그 중 대표적인 존재가 맘몬, 돈이다. 돈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신자유주의 사상이 주님 노릇을 하고 있다. 사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 힘에 질식하고 그 힘에 무서워하며 그가 만들어 내는 질서와 생명 안으로 들어가려고 안달들이다. 그 질서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낙오자여, 인생의 패배자요,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는 바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맘몬이 요구하는 풍요로움에 도취되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쯤은 파리 목숨처럼 여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분명하게 외쳐야 한다. 이 세상의 질서와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맘몬이 아니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러한 확신 속에 거하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충만해야 할 것이다. 어렴풋한 지식, 확신 없는 믿음 가운데 휘몰아치는 세상 세력과 어떻게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왜 오직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이해,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세상에 파묻혀 세상과 함께 멸망 당하고 말 것이다.

           18절 말씀에 의하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원래부터 진리는 그리스도가 온 우주의 머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주는 몸이고, 그리스도는 머리다. 몸은 머리의 통제를 받는다. 우주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여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땅에서 체험되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또는 다른 존재에 기대어 존재를 꾸려 나가려 한다. 이 상태가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이다. 죄란 근본적으로 어떠한 못된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향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킨다.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벗어나 있으니, 그런 존재가 하는 모든 일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추악한 일들 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바로 교회이다. 교회에서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체험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겠다고 고백한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래서 이리 떼 속으로 보내진 양들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주권을 외쳐야 할 사명을 가진 선교 공동체이다.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주권만이 살아 숨쉬어야 한다.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 앞에서 머리를 들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과연 어떠한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깊은 묵상과 충실한 신앙고백만 있어도 교회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주권이 살아 쉼 쉬는데, 그 숨결로 행해지는 모든 일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모든 충만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보는 것이 가장 옳은 해석일 것이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은 창조의 능력이요, 구원의 능력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것을 구원하시는 은혜의 능력이 모든 충만이다. 그러한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요, 새창조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때, 예수의 인성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역사에서 살다간,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의 제약과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신성에 맞닿아 있는 분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역사의 이단 논쟁은 모두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고백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단으로 분류되었다. 그리스도의 인성만 강조해서도 안 되고,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이 긴장관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엉뚱한 데로 흘러가지 않을 수 없다.

           20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은 화평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곧 화평과 화목의 피라는 말이다. 이는 구약의 제사법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서 죄 사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온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존재하게 된 것인데, 존재의 근거인 그리스도를 떠나 어떻게 존재를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신앙의 편협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외칠 때 거기에는 폭력성이 담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갑자기 심판의 망치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폭력을, 이러한 정죄를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지, 배타적이고 특수한 개념이 아니다. 신앙에 있어서,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주 만물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이지, 개인의 믿음이 아니다. 내가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지고,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태양빛이 싫다고 한들 태양빛이 가려지는가? 내가 숨쉬기 싫다고 한들 공기가 사라지는가? 이렇듯 하나님의 은총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내가 거부할 수도 없고, 내가 폐기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상태를 기뻐하시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우주 만물과 이루신 화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화평을 기뻐하시는 거다. 우리 안에 화해가 있는가? 우리 안에 화평이 있는가? 그것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다. 그러니 그건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선물을 누리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화평 가운데 살아갈 것이요, 그 선물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안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명확해지지 않는가? 화평 가운데 거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화해의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