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4. 06:01

골로새서


2.
하나님의 용서는 선행은총이다 (1:9-14)


골로새서는
머리()를 희게 만드는(노새) 서신같다. 웃기는 농담 같지만 사실이다.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야 이해되기 때문이다.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 그냥 지나치면서 읽을 수 없고, 묵상에 묵상을 거듭해야 이 말씀이 비로소 깨우쳐질 것이다(6).


이 단락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감사 기도가 담겨 있다
. 골로새 교회가 성령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바울과 디모데는 이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 했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행위는 서로가 서로에게 중보기도 해주는 것이다. 중보기도는 사랑의 행위이다. 중보기도는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기도할 수 있으랴!


골로새 교회를 향한 이들의 기도는 매우 근본적인 기도이다
. 잘 성장하고 있는 골로새 교회가 소망 안에서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돕는 기도이다. 이들은 기도하다구하다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집중적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이다
. 하나는 하나님을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행일치
(
知行一致)라는 한자어가 이 두 기도 제목의 관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구원 사건을 알아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폭력적으로 쓰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만물과의 화해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구원의 폭력적인 강요이다. 대중교통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외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폭력적인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는 것이다. 강요한다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깨달아지는 신비에 속한 문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윤리적 행동에로 이끌린다
. 왜냐하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윤리적 행동이란 세상이 말하는 윤리적인 사람, 세상살이를 잘 하기 위한 윤리적 행동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새사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가 행하는 선한 행위, 윤리적 행동의 시금석은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말 그대로, 예수님처럼 살기가 새사람의 가치관인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흑암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기 때문이다
.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건져내다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것은 구원사건을 의미한다. 이는 세례와 관련된 단어이다. 세례는 건져냄의 행위이다. 세례는 구원 사건에 대한 성례전이다. 보이지 않는 구원 사건에 대한 보이는 표시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구원의 영역인 빛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 빛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성도라고 불리는 것이다.


흑암의 권세는 인간 현실에 처해져 있는 죄와 죽음의 세력이다. 인간 현실은 죄와 죽음으로 물들게 되어 있다. 인간 현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죄와 죽음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게 되어 있고 행하는 모든 일 가운데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실행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악()을 생산해 내게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경험하는 바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하고 누군가를 사심 없이 도와주려고 해도 거기에서 선한 열매, 의의 열매, 행복의 열매를 맺기 힘들다. 그래서 그럴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인간은 누구든지 죽게 되어 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 아들의 나라에서 살게 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한 일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선한 일을 행할 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고 죄악의 냄새가 나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을 성령에 맡길 때 결국 최후 승리를 맛보게 될 거라는 희망 속에서 선한 일 하기를 그치지 않게 된다.


그 아들 안에서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궁극적인 사건은 속량이다(14). 속량은 노예나 포로를 무력이나 혹은 금전적인 대가를 치르고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채택된 단어이지,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항간에는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속전을 치르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마귀도 하나님 손 안에 있는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손 안에 있는 존재에게 속전을 치르신다는 말인가! 이것은 이 단어에 대한 명백한 오해이다.) 속전을 치르고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 중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한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먼저 은혜로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관계 회복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회개하면 용서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다.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를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든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용서의 은혜를 보여 주는 사건이다. 십자가의 용서가 먼저라는 말이다. 십자가의 용서가 있었기에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용서)을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선행은총이다. 이에 대한 반응이 회개이다. 하나님의 용서 없이 우리는 회개할 수 없다.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된다. 회개에 대한 보상으로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