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29. 02:22

일곱 화의 선언
(
23:13-36)

 

마태는 숫자 7일 좋아한다. 귀신이 등장을 해도 일곱이 등장하고( 12:45), 비유을 해도 일곱 개의 비유를 들고( 13), 용서를 해도 일곱의 숫자를 들어 설명하며( 18:21-22), 형제를 등장시켜도 일곱 명을 등장시킨다( 22:25). 그러니 당연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를 선언할 때도 일곱 개를 내세운다. 일곱은 완전함을 뜻한다. 이러한 일곱의 숫자를 들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꼬집는 것은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위선과 잘못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위선과 잘못이 조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전히, 꽉 찼었다는 뜻이다. 굳이 얼마나 위선이 흘러 넘쳐났는지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일곱이라는 숫자를 통해 위트 있게 표현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되는 화의 선언을 보면 이것이 도대체 누구에게 화를 선언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이는 분명히 마태가 유대교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이것은 유대교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하는 가 아니라, 마태복음을 경전으로 읽고 있는 기독교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하는 처럼 보인다. 그 중 두 번째 화 선언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 화 선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힘써 얻은 교인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천국으로 인도하겠다고 불러놓고 결국 위선된 모습으로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이 형국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박하와 회향과 근초에 대한 십일조까지 드렸다. 사실 이는 율법에서 정하고 있는 십일조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까지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정확한 십일조를 드리려고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그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종교적 경건 행위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고 그것을 토대로 유대 공동체 내에서 윗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말씀을 지키려는 그 마음이야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행위를 꼬집는 마태의 진술은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무엇이 신앙의 근본인가를 보여준다.

 

마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지적했다고 진술한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23:23). 여기에서 우리는 십일조의 정신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이는 십일조는 원래 관계의 개념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회복하는 것에 있었다. 십일조는 관계를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어떻게 정확하게 드릴까, 즉 십일조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십일조를 통해 회복해야 할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자. 결혼할 때 반지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확인해 주는 징표에 불과하다. 관계가 핵심이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 관계가 좋으면, 그것을 확인해 주는 반지는 꽃반지가 되어도 무방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관계는 충분히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랑과 신부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이들 사이는 10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고 받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인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은 데서 온 것이란 뜻이다. 올바른 관계는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표현할 수 있다. 올바른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한 거다. 자기 자신을 극대화시키는데 하나님을 이용한 것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종교적 행위는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찰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표현해야 할 종교적 행위가 자기 자신을 극대화시키는 데 쓰이고 있으니 이것이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결국 율법의 요약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이들은 온통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했던 것이다. ‘자기 집중’, 이것이 성경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원죄의 원형이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다. 자기 집중’, ‘교만을 종교 행위의 탈을 쓰고 감추었으니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일 리 만무하다.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종교 행위의 탈을 쓴 그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 행위의 탈을 쓰고 뻔뻔하게 위선적인 행동을 일삼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경전으로 읽고 설교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똑 같은 일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일이 그 위선과 잘못을 열거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알리라. 아직도 그 위선과 잘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 마태가 전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한 일곱 개의 화 선언을 꼼꼼히 들여다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지 보이리라.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독교인들이 또는 교회 지도자들이 종교 행위의 탈을 쓰고 저지르고 있는 위선과 잘못을 향해 이렇게 외치리라. “화 있을진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