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이끌림

 

자동차로 이동하는 동안 주로 두 개의 라디오 채널을 튼다. 하나는 NPR 뉴스 채널이고, 다른 하나는 클래식 방송 채널(Classical KDFC)이다. 뉴스는 주로 출근하면서 틀고, 클래식은 주로 퇴근하면서 튼다. 아침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궁금하고, 저녁에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마음의 평안을 누린다.

아침에 출근할 때면 지난 밤에 돌려놓았던 클래식 채널을 잠깐 듣게 되는데, 대개는 기계적으로 뉴스 채널로 바꾼다. 그런데, 어느 날은 클래식 채널을 바꾸지 못하고 그냥 놓아두는 때가 있다.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올 때가 그렇다. 며칠 전, 그러한 경험을 또 했다. 아침에 자동차 시동을 건 동시에 클래식 라디오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이었다.

 

브람스의 선율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의 곡 자체가 워낙 아름다워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의 교향곡 1번에는 그의 아름다운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베토벤을 잇는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파 작곡가이다. 그런데, 그는 세상에 이름을 내놓은 후에도 20년이 넘게 교향곡을 작곡하지 못했다. 베토벤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죽은 후,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과 어깨를 나란히 할 교향곡을 작곡할 자신이 없었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에는 그러한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교향곡 선율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베토벤이라고 하는 큰 산을 기어이 넘어선 후, 자신만의 선율을 조가비 속의 진주처럼 반짝이며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채널을 돌려버리는 것은 브람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멈추어 서게 하는 이끌림이 있다. 그런데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움은 짧은 시간에 빚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뇌와 노력, 그리고 오랜 수련을 통해서만 빚어지는 신비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며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베드로후서 1장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듯, 구원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에 이르는 길인 것처럼,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길은 정말 부단히 걸어 높은 산을 넘는 것과 같다. 마치 브람스가 부단히 걸어 베토벤이라는 높은 산을 넘었던 것처럼.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꿈꾼다. 베토벤의 교향곡 같이 아름다운 교회, 베토벤의 교향곡을 넘어서기 위하여 무단히 고뇌하고 노력했던 브람스의 교향곡 1번 같이 아름다운 교회, 우리 모두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간다면, 이끌림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길이 아름다운 선율을 듣는 것처럼 가슴 뛰는 일이 될 거라 믿는다. 그 꿈을 마음에 품고 오늘도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듣는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