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1. 13:50

예배보다 정의

마가복음 11:12-19

(고난주간 월요일)


어제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고난주간이 시작되었다.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을 묵상하는 절기이지 우리가 고난 당하는 절기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메조키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고난 당했으니까, 예수님처럼 우리도 고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한 번 보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5).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평화와 나음이지,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Passion),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수난(Passion)의 자리로 이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수용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힘에서 오지 않고, 정의에서 온다.”는 말씀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래서 어제 말씀에서 이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참된 평화가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 힘을 가지면 평화가 올 거라고 사람들은 흔히 잘못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부와 권력)을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힘을 갖는다고 평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왜 우리는 그토록 힘을 갖기 원하는가? 그래서 은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하면 점점 죽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마약을 찾게 되는 원리와 같다.

 

성경은 힘에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서 평화가 온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성경은 오직 그것에 대한 증거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로마서의 언어로 옮기자면, 하나님의 정의는 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로마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는 가 어디에 나타났다고 말하는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정의()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평화는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서 온다. 그래서, 의인(평화를 누리는 자)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오늘 말씀은 복음서의 말씀 중에 가장 기괴한 말씀이다. 예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오늘 말씀을 본 이들은 분명 예수를 성질 더러운 이로, 도대체 따르기가 힘든 위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저주와 폭력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오늘 이야기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하고 있다. 베다니는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뜻을 지녔다(물론 슬픔의 집이라는 뜻도 있다.). 베다니 동네에 무화과나무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무화과나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다니를 떠날 때 배가 고프셨다고 한다. 저 멀리 서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니 잎이 무성하여 그 나무에는 무화과 열매가 많이 맺혀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나무 가까이 가셨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이해가 안 되는 저주를 무화과나무에 퍼붓는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어떠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은 말씀이 곧바로 등장한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무화과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 잘못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그토록 심한 저주를 퍼붓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한 실마리는 이어지는 성전정화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화과나무 사건에 이어 나오는 성전정화 사건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또 한 번 깡패처럼 행패를 부리시는 장면을 연출한다.

 

성전에는 돈 바꾸어 주는 자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국의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영업을 한 것이다. ‘성전신학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영업이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기원전 900년 경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성전신학을 발전시켰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이 세상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곳이라는 신학을 펼쳤다. 성전은 단지 하나님의 거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매개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성전은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유일한 장소였고, 희생제사는 용서의 매개 수단이었다.

 

성전신학에 따르면, 어떤 죄는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용서될 수 있었으며, 어떤 종류의 부정한 것들은 단지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정화될 수 있었다. 용서와 정화의 매개체로서 성전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열어 주었다. 정화되고 용서받은 상태로 성전 안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마커스 보그, 도미니크 크로산, <마지막 일주일>, 25)

 

이러한 성전신학에 따르면, 당연히, 성전은 신앙의 중심지로 여겨졌고, 순례의 목적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부정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먼 곳에서 순례를 온 이들에게 돈을 환전해 주고 제사용 제물을 공급해 주는 일은 오히려 그들의 편의를 생각한 좋은 일이다.

 

그렇게 칭찬 받아야 할 법한 환전상과 제사 용품 공급 상인들은 내쫓으시면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7). 예수님의 책망은 만민이 기도하는 거룩한 집인 성전을 사람들은 강도의 피난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레미야서 7장의 말씀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예레미야서 7 11절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강도의 소굴, 피난처)으로 보이느냐?” ‘강도의 소굴, 강도의 피난처가 무엇인가? 강도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몸을 숨기는 곳이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들은 책망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온갖 강도같은 짓을 저지르며 살면서 성전에 오면 자신들이 행한 불의한 일들이 감추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은 정의와 예배를 동시에 강조하지 않고 예배보다 정의가 더 우선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거듭해서, “내가 너희의 예배를 거부하는 것은 너희에게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으며, “너희의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에 너희의 정의를 거절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결코 없다. 이를 증명하는 구절들이 여럿 있다. (마커스 보그, 도미닉 크로산, <마지막 일주일>, 90)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 21-24)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 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세아 6 6)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 6-8)

 

예수님은 성전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을 잘못 사용하는 자들이 더 이상 성전을 욕되게 만들지 못하도록 그들의 출입을 막기 위하여 성전을 폐쇄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통해서 마가복음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는 기분 내키는 대로 신적인 능력을 남용하는 사람이거나 비이성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처럼 성전이 타락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예배가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과격한 용어를 써 가며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예배에 목숨 걸어라!”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의 왜곡이다. 예배와 정의는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정의가 없기 때문에 예배를 안 받아 주시지,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의 행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열정을 보이면, 예수님처럼 수난(Passion) 당하기 마련인데,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열정(Passio)을 보이지 않으면, 그러한 것을 등한시 하면서 예배만 드리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베다니에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성전이 성전되게 하는 것은 정의이다. 예배가 예배 되게 하는 것은 정의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구는 메조키스트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새벽예배는 극기훈련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께서 목숨 걸고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우리 삶 가운데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 일을 하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은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이루어 내기에 불가능하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시고, 예배를 예배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 삶 가운데 이루기 위하여, 그래서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