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1. 13:46

우리는 어느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가?

(마가복음 11:1-11)

종려주일

 

옛날에는 산불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요즘 한국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는 그러한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 없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미술 시간에 단골로 등장하는 그림(포스터)의 주제가 두 개 있었다. 불조심과 공산당 조심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 당시 불조심과 공산당 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 미술을 통해 교육시켰는지, 그 배경을 너무도 잘 안다. 한국에서 내가 살던 동네에는 우면산이 있었다. 그런데, 심심치 않게 산에 불이 났다. 사람들의 부주의(특별히 담배꽁초)로 인해 불이 나기도 하고, 아이들의 호기심에 불이 나기도 했다. 옛날에는 놀게 별로 없어서 불 장난을 많이 하고 놀았다. 그리고 특별히 겨울이 되면 하늘에서 눈도 내렸지만, 북풍을 타고 내려온 삐라도 하늘에서 엄청 내렸다. 한 겨울, 논두렁 밭두렁에 나가면 눈만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삐라도 여기 저기 많이 흩어져 있어서 그것을 주워 파출소에 가져다 주면 학용품을 주곤 했다.

 

이처럼 어떠한 행동이나 주장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 존재하는 법이다. 불조심을 강조한 이유는 산불이 많이 났기 때문이고, 공산당 조심을 강조한 이유는 남북으로 갈린 국가의 아픈 역사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포스터)에는 그러한 배경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를 살던 사람들은 그 (그림)포스터를 보면 그 뒤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모두 알고, 그 그림(포스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아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는데,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이렇게 쓰여진 데에는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마가복음의 역사적 배경은 로마제국시대이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마가복음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진술을 듣는 우리는 아멘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 당시 마가복음의 이 첫 진술을 들은 로마제국시대의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이미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 메시아, 구세주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여겨졌던 사람은 로마의 황제지 예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예수는 로마제국의 반역자로서 그들의 형벌인 십자가 형에 처해져 죽임을 당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니, 마가복음의 주장을 들은 로마제국시대의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이 기록되고 있는데,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은 이러한 순서를 지닌다.

 

* 일요일: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11 1) – 예루살렘 입성 사건

* 월요일: “이튿날” (11 12) – 성전 정화 사건

* 화요일: “이른 아름에” (11 20)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의 논쟁 사건

* 수요일: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14 1)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가룟 유다의 모의

* 목요일: “무교절 첫째 날에,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14 12) - 마지막 만찬, 겟세마네 기도, 그리고 체포

* 금요일: “새벽에” (15 1) – 고난과 십자가 죽음

* 토요일과 부활주일: “이레의 첫날 새벽” (16 2) – 침묵과 부활

 

일주일 동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매일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 날에 일어났던 일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 지키고 있는 종려주일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보면서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절기로 유월절에 일어난 일이다. 유월절은 오순절(칠칠절)과 초막절(장막절)과 더불어 유대인의 3대 절기(명절) 중 하나이다. ‘성전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절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오는 것이 그들의 신앙적 전통이었다. 그들이 성전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차츰 알게 될 것이다.

 

유월절을 지키러 오는 순례 행렬 가운데, 두 개의 특이한 행렬이 있었다. 하나는 오늘 우리가 말씀에서 본 것처럼,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행렬이다. 다른 하나는 말씀 가운데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보다 더 관심 있어 하고 눈 여겨 보았을, 로마 총독(빌라도)의 행렬이다.

 

그 당시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않았다.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60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가이사랴에 거주했다. 예루살렘은 오래된, 배타적인, 살기 힘든 도시였지만, 가이샤랴는 해변에 건설된 신도시로서 모든 주거 환경이 매우 깨끗하고 좋았다. 그런데, 로마 총독은 유대인의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이 온 것이다. 왜 왔을까?

 

로마 총독이 유대인들과 함께 유월절 양을 잡고 유월절 식사를 하며 그들의 절기를 지키러 온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은 완전히 다른 데 있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이 몰리는 명절에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폭동을 예방하고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마를 타고, 칼과 창과 방패와 전차로 무장한 로마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그것도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러한 예루살렘 입성을 앞에서 뒤에서 따르며 호산나하며 환호하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그리고 있다. 예수님은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까?

 

지금은 한국도 자동차 산업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해서 그렇지 않지만, 2,30년 전만해도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그렇게 발전된 수준이 아니었다. 예전에 한국에는 검소한 차와 럭셔리 차의 대명사가 있었다. 티코와 그랜저이다. 티코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그 당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이런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말을 탄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탄 것은 그랜저를 탄 것이 아니라 티코를 타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그랜저 타지 말고 티고 타라. 예수님도 티고 타셨는데, 목회자가 그랜저 타면 못쓴다.”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멘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들의 잔치 같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촛불집회. 그리고 이것은 예언의 성취이고, 참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어떤 왕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는 그가 갈릴리를 중심으로 전했던 복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스가랴서의 예언을 알아야 무슨 뜻인지 파악할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구절이 있다. 번역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3절 말씀이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에서,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부분이다. 우리 말 성경의 이부분은 이런 뜻인 것처럼 읽힌다.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면, 나귀 주인이 나귀를 즉시 내어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영어로 보면 이렇다.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d it back here shortly”(NIV). 영어 성경을 보면 그 뜻이 정확해 진다. “주님께서 나귀를 쓰신 뒤 곧바로 다시 돌려주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해서, “잠시만 빌려주십시오! 반드시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의문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 나귀를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니까 막 내주나그리고 저렇게 남의 나귀를 막 가져다도 되나?” 그리고 이 본문으로 이런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있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내어드리라. 주님의 것인데, 주님이 마음대로 쓰시겠다고 하는데, 안 내어 드리면 죄다.” 이것 또한 위에서 본 티코와 그랜저 이야기처럼 성경을 오용하는 예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스가랴서에는 이러한 예언이 나온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9:9). 마태복음은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21:5).

 

중요한 것은 왜 왕이 그렇게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말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어지는 스가랴의 말씀은 이렇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9:10).

 

로마 총독과 예수님의 행렬, 이 두 개의 행렬은 대조를 이룬다. 로마 총독의 행렬은 로마제국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영화 그리고 폭력의 과시였고, 예수님의 행렬은 예수님께서 전하고 다니신 복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제국의 폭력과 완전히 대조되는 평화의 나라이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는 시편 118 25절에 나오는 이 말씀에서 왔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시편 118:25). 히브리어로 호쉬아 나인데, 이는 지금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이다.

 

우리도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호산나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외치는 오산나는 어떠한 호산나인가? 혹시 우리가 외치는 호산나는 이러한 호산나가 아닌가? “우리도 로마제국이 가졌던 권력을 가졌으면 좋겠! 우리도 그런 부를 누렸으면 좋겠다! 우리도 다른 이들보다 나은 위치에 올라서서 그들을 아랫사람 부리듯 했으면 좋겠다!”

 

예수님이 목숨을 바쳐 외쳤던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힘에서 오지 않고, 정의에서 온다. 미가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4:4). 이러한 일들은 정의와 번영과 안전의 상징이다. 성경에서 정의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땅을 갖는 것이다. 번영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생계를 유지하고도 남을 정도인 상태를 말한다. 안전은 끊임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참된 평화가 있는가? 모든 사람이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현재, 한국이나 미국이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는 빈부의 격차이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상위 10%가 차지하고 있는 부는 미국 전체 부의 거의 80%이다. 많은 이들이 먹고 사느라 허덕이고 있다. 번영은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다. 전쟁과 테러의 소식 끊임 없이 들려온다.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고,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몰라 불안하기 그지 없다.

 

이러한 불의를 나몰라라 하면서, 다른 이들이 어떻든, 이 사회가 어떠하든 상관하지 않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호산나, 주여, 나를 지금 당장 구원해주소서, 형통케 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외쳤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넘어서는 길을 가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다는 말도, ‘신뢰믿고 맡김의 뜻을 지니고 있다. , ‘복음을 믿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소식을 신뢰하고 그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다’. (마커스 보그, 도미닉 크로산, <마지막 일주일>, 57)


우리는 어느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참된 평화를 외치며, 예수님께서 외치신 복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부추기는 권력과 폭력의 길을 따르지 말라. 예수님처럼 온유한 마음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라. 다른 누구, 또는 무엇이 아닌, 오직 참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 자신, 가정, 교회,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자.

 

무엇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교회,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가득 넘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다함께 외쳐보자. ‘호산나!’ 서로 인사 나누자.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우리 평화롭게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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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